여운형 그는 누구인가?
여운형 그는 누구인가?
  • 백운신문편집부
  • 승인 2006.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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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양반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몽양은 일찍이 1900년대에 기독교와 애국계몽 운동을 접하고 교육사업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전개했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간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도쿄에 가서 일본 조야(朝野) 각계의 인사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적극 역설하는 등 외교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부터 선진 사회주의 사상을 접한 그는 이동휘의 ‘공산주의 그룹’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1921년에는 고려공산당(상하이파)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상하이지부에 가입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하여 레닌 등과 면담하기도 했던(1921~1922) 여운형은 1923년 국민대표대회의 무산을 계기로 독립운동세력의 파쟁을 경험했다. 이후 독립운동이 분열, 침체된 1924년부터 1929년까지는 ‘중국 혁명을 통하여 조선민족이 해방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했다. 이로 인해 1929년 일제 경찰에 잡혀 중국으로부터 압송되었다.

 

여운형은 1932년 출감한 후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체육회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1936년 이후부터 1942년까지는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다소 이탈한 시기로서 도쿄를 왕래하면서 유력층과 관계를 맺었다. 이때 도쿄에서 조선독립을 선전했다 하여 1942년부터 1943년까지 두 번째로 복역했다.

 


 

몽양은 1943년 출감 후 정치일선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위장하면서도 1944년에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비밀단체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이러한 해방 직전의 조직운동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그는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결성하였다. 건준은 힘의 공백기에 준정권적 기관으로서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자치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그 중심에 여운형이 있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 박헌영 세력의 주도에 의하여 1945년 9월 6일 건준은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전환되었다. 건준이 인공으로 전환할 때 몽양이 완전히 들러리를 선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좌익 진영의 헤게모니를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게 내어주는 형국을 연출했다.

 

한편 여운형은 인공의 부주석으로 지명되었으나 주석으로 지명된 이승만 등 우익 진영이 “임시정부를 봉대해야 한다”면서 참가를 거부하고 미군정이 부인했기 때문에 인공은 곧 유명무실해졌다.

 

1945년 12월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조선인민당으로 전환시켜 대중정당을 조직하였으며, 1946년 1월 좌익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에 참여하여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5월부터 우익 대표인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을 주도하였으며, 박헌영 세력이 주도하는 3당 합동에 반대하여 남조선노동당에 참여하지 않고 근로인민당을 결성했다. 조선인민당에서 근로인민당에 참여했던 여운형 세력은 조선공산당에서 남로당에 참여한 사람들보다 온건했으며 또한 그 가운데 기회주의적 인사도 상당수 있었다.

 

1946년 여름 미·소 공동위원회(이하 공위) 휴회 후 미국은 ‘계속 우익만을 지원할 경우 여운형 등의 개혁세력이 공산당과 힘을 합쳐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상황인식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운형 세력을 박헌영 세력으로부터 분리하여 진보적 개혁을 실현하고 이를 통해 혁명적 열기를 개량화시켜 공산화를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미 국무부 내의 일군의 용공적 자유주의자(liberal)들이 좌우합작을 주도했다. 이렇게 미국은 ‘공산화 방지’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좌우합작위원회와 과도입법위원 설치를 적극 추진했으며 미군정이 조선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 상태에서 합작을 적극 지지했던 사실에서 미국의 숨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합작 당시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김규식과 여운형이 미국의 이익만을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운형은 입법위원 설치를 반대했으며 소련 주둔군 인사와 김일성 등을 수차례 접촉해 남북을 통틀어 좌우합작을 실현시키려 했다. 1946년에만 5차례 방북하는 등 공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북쪽과 가장 많은 접촉을 했다. 박헌영을 견제하려는 김일성은 여운형의 제안을 경청하기는 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는 좌우합작에 대해 소련이 비판적이었으므로 김일성은 여운형의 복안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일 수 없었고 대신 소련과 함께 우익 배제에 의한 독자적 건국을 추진했다.

 


몽양은 이렇게 남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에 의한 건국노선을 견지했으나 이미 미·소 냉전이 현실화된 상황에서는 이상론에 불과한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통일을 지향한다고 했을 때 가장 현실적 노선이 바로 몽양의 그것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며 1948년 이후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참여 노선이 좌우합작 노선의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운형은 슬하에 4남3녀를 두었는데 해방 전에 두 아들은 병사했다. 테러가 횡행하던 해방정국에 신변보호에 위협을 느끼던 몽양은 둘째 딸 연구와 셋째 딸 원구를 1946년 봄 김일성에게 부탁해 평양으로 보냈으며 나머지 2남1녀도 1950년까지 순차적으로 월북시켰다. 연구와 원구는 모스크바로 유학 보내졌으며 대남공작의 목적에서 북한의 고위직에 올랐다. 이 점에서 “그의 노선이 결국 친북적인 것으로 귀결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으나 확대해석일 뿐이다.

 

2005년에 유일한 혈육이었으며 북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여원구씨가 몽양의 서훈을 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으나 그녀는 남쪽의 서훈을 거부했으며 3·1절 이후 몽양의 친족에게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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