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왕혈(咸王穴)실존역사 기록 확인 및 학술 기록 근거는 ? - 양평고대사 검증 시리즈(5)
함왕혈(咸王穴)실존역사 기록 확인 및 학술 기록 근거는 ? - 양평고대사 검증 시리즈(5)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24.03.2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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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왕주악(咸王周鍔)함혁왕(咸赫)뒷바침 함왕성(咸王城)관련 세종실록 선조실록 일제고적답사 등 역사 추론 충분" 향통유적"지정 시급
▶ 함왕혈 전경
▶ 함왕혈 전경, 깊이를 알수 없을 정도로 깊은 함왕혈.

■역사적 근거1:함왕혈/함왕성 유적- 세종실록지리지
함(咸)씨 토착성씨 수록
(1424, 세종6년)

세종실록지리지는 1424년 세종 6년에 세종대왕이 변계량에게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편찬할 것을 명한 것이 발간이 되어 만들어진 한국 역사상 세 번째로 만들어진 지리지다.
훗날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과는 달리 각 고을의 광물, 조세, 군역뿐 아니라 성씨와 토공, 토산물과 역, 봉수, 산성, 사찰 등 모든 요소를 총정리해 놓았다. “양근의 경우 토착 성씨로 함(咸)씨를 필두로 탁(卓), 부(傅), 경(耿) 씨가 살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 함경도 정평 도호부 편에서 양근함씨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대 발간된 양근함씨 족보에 의하면 양근함씨 가문에는 선영이 함경도 정평에 있는
사람도 있다는 점에서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사실임을 객관적 자료이자 합리적인 추론을 반증하고 있다.

양평이 함씨들의 본향이자 함왕혈과 함왕성의 유구한 2천년 역사와 함께한 함씨 왕조(咸氏王朝) 역사적 문화재 복원이 경기도와 양평군의 관심 속에 속히 이뤄지길 양평군 향토사학계는 촉구하고 있다.

▶ 조선선조실록
▶ 조선선조실록

■역사적 근거2: 조선 선조실록(宣祖實錄,1594.02)

선조실록은 조선 제14대 국왕인 선조의 재위 40년 7개월을 기록한 것으로 총 221 권 116책으로 구성돼 있다.

함왕성에 대한 기록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3년째인 1594년 2월 선조가 신하
노직이라는 사람에게 경기도 내 왜적에 대한 대비책을 묻는 과정에서 양평의 함왕성이
거론된 것이 전부이다.

이때 '노직'이라는 신하는 “파사성과 용진(옛 양수리 지명~강상면 사이
남한강 일원을 말함) 사이에 부용산이 있습니다. 또 사궁성(舍弓城)은 양근군 남산(옥천 소재,건지산과 함께 양근군 읍치 주산)이라는
곳에 있는데 사탄(沙灘)의 높은 곳에 있어 여주나 충청도에서 들어오는 왜적을
파사(파사성)와 용진(양수리~강상면 사이 남한강) 밖으로 쫓아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함왕성은 사궁성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사관의 오기로 보다는 '노직'이라는 신하가 지명을 잘못알고 말한 왜곡된 표현으로
보인다 ‘성 이름을 함(含) 자로 잘못 알고 한자가 비슷한 집 사(舍)’로 잘못 기록했으며 ‘공성(公城)’을
소리 나는 대로 음차해 ‘弓城’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본 필자의 합리적인 추론이다. 이는 양평 향토사 학계에서 큰
고민거리로 30여간 갖가지 주장이 난무했으나 대체적으로 필자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게 최근 학계의 시각이다.

■역사적 근거3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선고적답사(1916)
함왕성 수록

1908년 9월 14일 순종황제 칙령 제 69호로 ‘부·군 폐합에 관한 건’에 따라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병해 양평군이 거대면적으로 새로 탄생된
이후 ‘양근성’이란 말과 ‘함공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까지 백여 년 동안 ‘함왕성’으로 다시 굳어졌다.
함왕성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남긴 사람은 일제 강점기인 1916년 조선 총독부 명에 따라 전국을 순회하며 명승고적을 답사함은 물론 사진
자료까지 남긴 ‘이마니시류’(금서룡, 今西龍)씨가 만든 ‘조선고적 탐사’라는
책자다.
‘이마니시류’는 일제시대 최고 권위 학자로 경성제국대 교수로 단군신화가 고려 인종 때 새로
만들어졌다는 등 한민족 상고사를 철저히 파괴하고자 했던 '식민사관 주동자'였으나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는 최초로 조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자이며,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는 고적답사기에서 함왕성을 설명하기를 “이 함왕성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삼한(三韓)의 초기에 함왕혈으로부터 출생한 함왕(咸王) 주악이라는
사람이 이 성에 본거지를 두고 부근을 정복했다. 함왕은 삼한시대에
멸망했는데 자손이 성(姓)을 함(咸)이라 하고 본관을 양근으로 했다고
한다.”라고 썼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나 이 같은 애길 들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양평군청 공직자를 통해 들었을 가능성이 크며 유래에 대한 식민사관과는 전혀 성관없는 구체적 답사 현장 설명이라서 주목받을 만하다.

이렇듯 함왕혈과 관련된 역사적 연결고리인 함왕성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 곳고에서 뒷바침하고 있으며, 이는 전국 시조 설화 탄생지가 문화재로 지정 보전되고 있는 경주 계림 및 제주 삼성혈 등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뿐 아니라 양근함씨 후손은 물론 양평군민과 한강본류 수도권들의 역사적 자긍심이기도 하다.

▶ 동국여지승람 양근군 일원 지도
▶ 동국여지승람 양근군 일원 지도

■ 함왕혈 향토유적 등 지정문화재  검토 및 행정절차 이행 시급

함왕혈에서 샘솟는 맑은 물은 함씨 왕의 탄생설화에 덧붙여 오늘날 팔당상수원 생명수
젖줄을 공유 받고 있는 2500만 수도권 주민의 생명수 설화이기도 하는 무한한 확장성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에 동명왕 주몽 탄생 설화의 경우 당시 민족 개념과 국경 개념이 별로 없었던 터라
오늘날 부여지역 스키타이 민족을 대표하는 유전자인 ‘하플로 Rna’는 한반도 유전자풀과
서로 연계성이 떨어져 실화의 존재감이 크게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한시대 성읍국가 전설과 설화는 단군신화처럼 거창하고 신성한 장소로 민족적 성지화는 되지 못했다. 다만 함왕혈의 경우 이미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많은 시조 탄생지처럼 구체적으로
제한된 시간, 장소 및 특정한 증거물과 연계된 숱한 고증자료와 지역민들 사이 전래되고
있는 역사적 증언들이 곧 팩트이자 증거물이 되고 있는 만큼 객관적 설득력과 진실성이 뒷받침된
대표적인 원삼국시대 씨족 설화, 더 나아가 국내 유일한 마한 목지국 산하 54개 소국 중
'일화국' 부족국가 설화라 해도 전혀 설득력이 떨어지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경기도와 양평군의 향토유적 지정 및 문화재 지정이 만시지탄의 감은 없지 않으나 대한민국 최초의 마한 연맹체 소속 소국의 성주자 시조 왕의 탄생설화로서 가치 보전이 시급하다는 양평군민의 여망이다. 함왕혈이 황왕성을 포함한 일괄유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족적이 았는 만큼 양평군수 등 지자체 단체장과 지방의회에서 관심을 보일때라는 양평군민의 주문이다.

타지역에서 이정도 유적이 발굴됐다면 전국적인 이슈와 문화재 복원관리가 이뤘졌을 것이라는 아타까움이 있는 호소다.

■ 함씨 기자조선 동행 도래설 근거부족 일축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 무왕 기자도래시 함혁왕 도래설은 시차 1천년 이상차이가 나 근거 전무하다.

그렇다면 함씨(咸氏)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설화에 의하면 함씨의 시조는 “경기도 용문산(龍門山, 미르산, 미지산
1,157m, 미르/미지는 용의 옛말)서륵 양평군 옥천면 용천 상곡의 개천의 굴에서 함왕이 탄생했다.”라고 한다.
세칭 함왕으로 일컬어지나 함씨구보(舊譜)에는 함왕, 혁(咸王,赫)으로 기록돼 있다.
익화자사(益和刺史,양평군수)로서 외적을 물리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평안하였다.
힐융선위(詰戎宣威)하니 제구 병적(諸究兵籍)이오, 예의 시교(禮儀詩敎)하니 동인
식견(東人息肩)이라 북양(北陽)과 복홀(伏忽)등 두현을 일군(一郡)으로 합하여
양근군(陽根)으로 기록하고 있다.
함씨 구보에는 의하면 함왕, 혁(咸王,赫)은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것도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주(周) 나라 무왕(武王) 초 기자(箕子)를 따라 들어왔다는 설이다.
강릉함씨 옛 족보 문헌에 함혁시조에 대해 “중국의 병부상서로 주나라 무왕 초년에
기자를 따라 특별히 대사마 대장군을 제수 받아 우리 나라에 왔는데 안찰사를 겸하였다.
당시 고을이 왜구의 침입을 받았는데 공을 세웠다. 북양(北陽)과 복홀(伏忽) 두 현을
합하여 한군으로 만들고 석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만 9056척이었다.”라고 기술되 있다.
또 “용문산 청학동에 백성들이 감흡하여 사당을 세웠고 비석을 세운 뒤 ‘금사광록대부
익화부원군’이라 새겼다.”라고 기록했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그 자체가 믿기 어렵다. 한마디로 터무니 없다.

주나라 무왕 희발은 기원전 11세기, 즉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800여 년간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로 마한 연맹체
및 원삼국시대와는 시차가 최소 1천 년 이상 차이가 난다. 제1대의 천자인 무왕은 기원전
1043년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용중에 당시 전무한 고려 시대 관직이 툭 튀어나오는 등 후대 사가에 역사적 검증이 없는 상태에서 두서없이 기록한 내용에 불과하다. 일제시대 대전 회상사를 중심으로 많은 족보 업자들이 전국 유명족보를 가져다 짜깁기 할때 이를 모르고 각 문중에서 족보 보강작업을 할때 다른 문중의 기록을 첨삭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며 , 이런 역사적 오류는 대한민국 족보 약 90% 이상에서 발견되고 있다.

■ 함왕 주악(周鍔), 함혁(咸赫)왕 탄생 실화 성지

또다른 기록은 당(唐) 무종(武宗) 회창기사(會昌己巳)에
등제하였다 한다.

당나라 제15대 황제 무종 숙황제(肅皇帝)는 서기 840년 2월 즉위하되 846년 4월
사망하여 시대가 크게 엇갈리며, 함왕 혁의 14손인 함신(咸信)이 원성왕(신라 38대 왕, 785-798) 초년에 명주군왕 김주원(혜공왕 13년 시중, 국무총리급,
777년) 과 함께 강릉에 들어왔다는 연대와 전혀 맞지 않는다.

▶ 용문산 친환경농업박물관에 원형 조형물이 특별 전시중인 함왕혈. 그럼에도 향통유적 지정이 안된 상태라 주민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 용문산 친환경농업박물관에 원형 조형물이 특별 전시중인 함왕혈. 그럼에도 향통유적 지정이 안된 상태라 주민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 함왕 익화차사(益和差使)설도
근거미약, 시차 900년 차이,
21세손 중시조 함규(咸規,
945년 사망)와도 314년 시차

익화연이 양평에 최초로 등장하는 1269년(고려 원종 10)이다. 양근과 관련된 사례로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257년(고려 고종 44)에 양근을 영화(永化)라고도 불렀고 1269년(원종 10)에는
위사공신(社功臣) 김자정(金子廷)의 향라라는 이유로 승격하여 익화현령(益和縣令)으로
삼았다.”
이후 1356년(공민왕 5) 익화군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함왕 탄생시기를 아무리 늦추어도 원삼국시대
A.D 2~3세기와는 무려 1000년 이상 차이 날 뿐만 아니라 중시조인 고려 건국 개국공신인
함규장군이 돌아가신 해 또한 서기 945년(고려 혜종 2)이므로 익화현과는 76년 이상 차이 날
뿐 아니라 개국공신으로 요즘 국무총리 격인 광평시랑을 거친 분이 시장-군수격인 '익화 현령(양근군수)'을 했을리는 천부당 만부당할 것이다. 따라서 함왕 익화차사 설은 훗날 위사공신 김자정(원종 10년 김자정 익화현령)을 함왕과 오인해 발생한 낭설일 것이 본 필자의 합리적인 추론이다. 익화현은
1269년 영화현(永化縣)에서 최초 개칭된 것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고문서 기록을 볼때 양평군은 1908년 지평군과 합병되어 양평군으로 개편되었다. 현재의 양평군에 인근 광주시 남종면과 가평군 설악면도 양근군 땅이었다.

박현일양평군정연구원장(양평의회3선의원,한국사 1급, 논술1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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