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일 양평역사스페셜] 거란침략과 양평인의 항전 고찰
[박현일 양평역사스페셜] 거란침략과 양평인의 항전 고찰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23.09.0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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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1천필 노획, 게릴라전 등 대승, 대거란전 혁혁한 전과

1212년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가 농안(農安)에서 10여 만명의 무리를 모아서 요왕(遼王)이라 칭하고 모든 주군을 장악하고 함평(咸平, 開原)에서 도읍을 열었다. 그러나 야율유가는 곧 부장 야율사포와의 충돌에서 위기를 느껴 몽고로 투항하자, 야율사포가 무리를 통솔하여 1216년에 징주(澄州, 海o)에서 국호를 대요수국(大遼收國)이라고 하였다.

야율사포도 불과 70여 일만에 부하에게 피살되고, 얼마 되지 않아 몽고에 투항한 야율유가가 몽고군을 이끌고 다시 나타나 쫒기게 된 대요수국 거란 유민들은 야율사포의 아들 금산왕자(金山王子)를 중심으로 개주(開州, 봉황성)에서 몽고군을 격파하고 후퇴를 거듭하며 상대적으로 변방 수비가 취약한 동쪽의 압록강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마침내 도강을 해 고려영토를 침범하였다.

이번 거란 침입은 시기적으로 고려 고종 3년(1216년) 8월에 금산왕자가 고려의 북계병마사에게 식량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승상 걸노로 하여금 군사 수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영삭진 등을 침범하면서 시작되어 약 4년간 단양 죽령이북에서 압록강까지 전선을 확대하며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면서 곡물과 가축을 약탈하며 공방을 계속하였다.

이 거란과 전쟁은 고려가 최초로 몽고군과 연합군을 편성한 것으로 1218년 12월(고종 5년) 징키스칸이 보낸 몽고 원수 카진과 부원수 잘라가 군사 1만명, 완안자연이 이끄는 동진군 2만 명 등 총 3만명이 합세하여 화두, 맹주, 순주, 덕주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거란군이 총 집결해 있던 강동성(평양 동쪽의 성)을 2019년 정월(고종 6년)에 함락시켰다.

이때 고려의 조충과 김취려 장군이 이끄는 고려병사는 군량미 1천 석을 지원하는 등 연합작전을 성공시키며, 강동성을 포위한 후 강동성 밖에 폭과 깊이가 10척(3m)이나 되는 도랑을 파서 적의 탈출을 막았다. 적의 기세가 꺽여 투항하는 사건이 잇따르자 거란군 수괴 함사왕자가 목메어 죽자 군졸과 관원, 부녀자 등 5만여명이 항복하였다.

김취려는 거란군 포로 중 소년 남자 700명과 포로가 되었던 고려군 200명 등 총 900명을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징기스칸은 포리대인 등 사신 10여명을 개경에 함께 보내 고려 고종과 정식으로 수호조약을 맺고 국교를 시작하였다. 거란군이 4년간 남한강 유역까지 침범하면서 양평도 인적, 물적 피해가 적지 않았다.

고종 4년(1217년) 5월에 병마사에게 식량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승상 걸노로 하여금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영삭진 등을 고려하게 하여 곡물과 가축 등을 약탈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종 6년(1219년) 정월에 조충, 김취려 등이 몽고, 동진군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포위하자 적의 괴수 함사왕자가 목매여 죽고 그의 관원과 군졸, 부녀자 등 5만 여명이 성문을 나와 항복한 것을 끝으로 전후 4년간 계속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압록강과 정평(定平) 이남 남한강 충주 단양 양근 지평 등 죽령(竹嶺) 이북 지역에 걸치었던 만큼 인적, 물적 피해가 적지 않았다.

고종 4년(1217) 5월에 전군과 우군이 지평현에서 적과 싸워 격파하고 말 1천여 필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고, 이어 전군과 우군이 양근현과 지평현에서 적과 여러 번 싸워 금은패, 산자 등을 많이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최충헌은 이번의 전공을 포상하여 우군병마 오효정을 상징군으로, 전군지병마사 곽공의를 위위경으로 승진시켰다. 이때 전군병마사는 김취려였고, 우군병마사는 오효정이었다.

지평전투에서는 지형적으로 보아 용문산(龍門山)을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또 적이 지평현과 양근현에 침입하였을 때 이 지역의 이민(吏民)들은 이 지역의 주성(主城)인 양근성으로 입보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이들 전투에 대한 사료가 단편적이고, 전투가 공성전(攻城)이 아닐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양근성에 대한 언급이 없었지만 이미 이 시기보다 월씬 앞서 고구려형 포곡식 석축산성 형식 축조 또는 수축(개축)된 것으로 확인되고 양근성(함왕산성)이 인근 파사성( 개군면 하자포리)과 봉성(양평읍 봉성리), 고산성( 양평읍 떠드렁산), 부용산성( 양서면 신원리) 등과 어떤 형태로든 거점 역할을 했으리란 분석이다.

하여튼 이달 적들은 동쪽으로 향하여 동계로 들어가 철원, 춘천을 점령한 후 일파는 원주로 남하하고, 일파는 지평현과 양근현으로 남하하자 전군과 우군은 지평현에서 적을 격파하여 말 천여 필을 노획하는 승리를 거두고, 이어 전군과 우군은 양근현과 지평현에서 여러 차례 적을 격파하였다.

특히 전공으로 우군병마사와 전군지병마사가 포상을 받을 정도로 대승을 거두었다. 결국 양근 · 지평전투는 맥곡전투, 제천전투, 박달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으며, 적의 남진을 저지시키는 데 기초를 마련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들 거란군 적들은 주로 장기간의 공성전(攻城戰) 위주의 어느 지역을 장기간 확보하려는 전투와 전략이 아니고 처와 자식을 거느리고 이동하면서 하는 전투인 만큼 철저한 약탈과 포로 등 인력수탈을 위주로 하는 전투를 주 전략으로 삼았다.

박현일( 양평군정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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