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소년의병 2천리길 종군 항일투쟁 혁혁한 전과 …"동상 세워 기념하자"
양평 소년의병 2천리길 종군 항일투쟁 혁혁한 전과 …"동상 세워 기념하자"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23.04.1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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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 소년의병 ‘2천리 종군 항일투쟁’ 120년만에 역사발굴
(사진설명 - 구한말 양평의병 사진)
(사진설명 - 구한말 양평의병 사진)

양평군 탄생 110년사에 길이 남을 17세 양평 소년의병 항일투쟁사가 발굴됐다.

열일곱 나이에 조국을 위해 분연히 싸운 양평출신 소년의병의 일대기가 구한말 의병이 일어난지 한세기가 넘은 호국의 달을 앞두고 새롭게 빛을 발하면서 발굴돼 군민의 자긍심을 한껏 고취시키고 있다.

양평의병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을미사변ㆍ단발령 등 일본에서 유린당한 국권을 바로세우기 위해 1895년 11월(양 1896년 1월 乙未年) 안종응ㆍ이춘영ㆍ김백선 등이 지평에서 거의, 포군 400명과 함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로 이동, 창의한 의병은 원주ㆍ제천ㆍ단양ㆍ풍기ㆍ충주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들 의병중에는 1896년 7월 (음) 28일 의병을 해산하기까지 의견을 따라 종군하면서 의병 최후의 전과로 기록된 초산전투를 대승으로 이끌게 한 양평출신인 손용문 소년의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손의병은 1896년 2~3월경 당시 충북 제천의 남쪽 남당촌에 진을 치고 일본군과 맛서 민족자존과 국권회복을 위해 남한강 가흥까지 오가며 치른 전투에서 김정순ㆍ김성화 장수와 함께 장렬히 숨진 손덕화의 외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분기해 의병에 합류했다.

손의병은 이후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관군에 의해 제천이 함락된 후 죽령을 넘게 풍기에서 당시 소백산을 넘어 영춘을 거쳐 단양ㆍ충주ㆍ음성ㆍ여주ㆍ정선등지를 종군했다.

손의병은 국권회복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의병들이 서행(西行)할 때 2천리길인 압록강변 초산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고초와 어려움을 무릅쓰고 대열을 따랐다.

손의병은 초산에 도착하기 직전, 몸이 아파 대진과 떨어져 있다가 적병 300여명이 추적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픈몸을 이끌고 밤새워 이백리길을 달려와 본진에 긴박감을 보고해 1896년 7월16일 의병 최후의 전투인 초산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했다.

초산전투는 적이 만약 앞길을 끊을 경우 사면초가에 빠져 큰 위기에 처할뻔 했으나 손의병 덕분에 한밤중에 적병을 먼저 기습, 퇴각하는 적을 20리나 뒤쫓아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의암 류인석선생 서행대략'이란 당시 책자속 기록은 전하고 있다.

다음날이 7월17일 군사를 정돈한 후 의병들은 자신들을 위기에서 구한 최고의 공로자로 손의병을 만장일치로 선출, 상을 주었다.

손의병의 기지로 의병 최후의 전과와 함께 큰 병력 손실없이 3일후인 7월20일 무사히 압록강을 건넌 의병들은 7월28일 중국땅 회의현 파저강변에서 의진을 해산하고 재기를 도모하였다.

양평군과 양평문화원 등은 이같은 손의병의 애국활동이 후세 지역 청소년들의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기록물 발굴 및 동상을 건립하는 방안 등을 향후 검토할 계획이다.

한편 손의병의 아버지 손덕화는 1896년 1월 유인석대장이 충북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즉시 가담했고, 김백선(金伯善) 의병장의 지휘하에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는 가흥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거센 반격으로 의병대는 큰 피해를 입었고, 손덕화의병 역시 전투 도중 전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손덕화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손용문 소년의병의 할아버지도 의병활동을 한 3대가 의병가족으로 추후 사료발굴이 요구되고 있다.

양평군의회 회의를 통해 손용문 소년의병 추모 동상 건립을 여러차례 강조했던 본지 박현일대표는 "차제에 이를 공론화 뜻있는 지역 사회단체와 공조해 손용문 동상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족할 계획을 검토중에 있다"고 말했다.

박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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