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
  • 홍용선
  • 승인 2001.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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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충숙왕(忠肅王) 10년 (1323년) 간신 오잠과 유청신 등은 원(元)나라에 청하여 고려의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의 행정구역의 하나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에 원 나라 영종(英宗)은 이들의 청을 받아들여 저들의 정동행성(征東行星)을 고려에 두고 국호를 아예 폐하려 하였는데, 이때‘나라는 그 나라요, 사람은 그 사람(國其國, 人其人)’의 대의(大義)를 들어 고려의 주권을 역설하고 그 불가론을 대문장으로 올려 저들의 음모를 저지한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원 나라와 고려에 걸쳐 일세를 문필로 누빈 익재 이제현이다. 만일 그 때 이제현이 없었다면 고려의 국호는 없어지고 주권을 잃은 망국의 역사는 길이 남았을 것이다. 대문장이란 이렇게 국가의 안위를 좌우하고 시대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현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13년(1287), 경주에서 정승 진(鎭)의 아들로 태어나 15살의 나이에 성균시에 급제한 후 충숙왕, 충선왕(忠宣王), 충혜왕(忠惠王), 충목왕(忠穆王), 충정왕(忠定王), 공민왕(恭愍王)등, 일생동안 일곱명의 왕을 모시면서 충성을 다하다가 공민왕 16년(1367)한 여름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만고의 충신이었다. 그의 초명은 지공(之公)이요, 자(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 또는 말년에 역옹이라고도 하였다. 그는 천성이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매사에 어른다운 의연함이 있어서 주위의 촉망을 받았는데 특히 시, 문, 서, 화에 모두 통달해서 그의 이름이 더욱 높아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는 원 나라에서 처음으로 정주학(程朱學)이 도입되었을 때 이를 배워서 고려에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을 처음으로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와 충선왕과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어서 충선왕이 원 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에 머물면서 그 곳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었을 때‘연경은 천하의 선비가 모여 학문과 예술을 논하는 곳인데 내부 중에는 중국의 선비들과 겨눌 사람이 없으니 부끄럽구나’하면서 불러들인 사람이 바로 이제현이었다. 당시 만권당에는 조맹부(趙孟부), 주덕윤(朱德潤), 원명선(元明善), 염복(閻復)등 일세를 풍미하는 원 나라의 대예술가들이 드나들었는데 이제현은 이들과 교유하며 당시 원대의 문인화 사상과 새로운 화풍을 자연스럽게 수용해갔다. 이제현은 당시 31세의 나이로서 64세의 조맹부와 망년지교(忘年之交)의 사이가 되어 막힘이 없었으며 당대 중국의 거물들과 교유하면서 그 가운데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원의 학자들을 경탄케 하였다. 그는 충선왕을 잘 보필하여 충선왕을 따라 양자강 남쪽을 여행하기도 하면서 가는 곳마다 이역에서 홀로 왕을 모시는 외로운 신하의 회포를 시로 읊기도 했는데, 이때에 지은 시들은 모두가 걸작으로 지금도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가 이때 충선왕을 모시고 항주(杭州)에 들렀을 때 원 나라의 일류 초상화가였던 진감여(陣鑑如)로부터 그의 초상화를 선물로 그려 받기도 했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영주(塋州) 소수서원(昭修書院)에 보관되어 있는 안향(安珦)의 초상화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화중의 하나로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제현은 훗날 충선왕이 원 나라 영종에 의해 연경에서 15000리나 떨어진 토번(吐蕃, 투르판)땅에 귀양을 가게 되었을 때 단신으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충선왕을 찾아가 보필을 하면서 장문으로 왕의 억울함을 대변하여 충선왕이 다시 연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이때 이제현이 충선왕을 찾아가다가 지은 <황토점(黃土店)시> 3편과 <명리행(明夷行)시> 1편은 그의 힘없는 조국에 대한 울분과 임금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어 지금도 읽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준다. 그가 고려의 국호를 없애려고 했던 영종과 고려의 간신들의 음모를 대문장을 지어 좌절케 한 것도 바로 이때였으니 그의 나이 38세 때였다. 그는 이후로도 당시 원 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무력한 충혜왕과 충목왕을 위해 큰 공을 세웠으며 공민왕이 중 신돈(莘旽)에게 미혹하여 국정이 문란해 졌을 때 그를 내칠 것을 왕에게 충언하기도 하는 등, 국난중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이제현의 당당한 소신과 남대함을 두고‘그는 담력이 몸보다도 더 크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그는 말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산수간에 자적하면서「역옹패설」을 간행하였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의 많은 설화와 수필들을 모아놓은 책이었다. 이외에도 그는「익재난고」10권,「습유(拾遺)」등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 나라 문학사상 최고봉을 이루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일곱 임금을 한결같이 충성으로 섬기면서 네번이나 재상을 지냈고 문장과 서화로써 원 나라와 교섭하여 국난을 막고 국왕을 보호하며 새로운 학문과 예술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앞장을 섰으니, 그는 고려말의 난세를 누빈 정치가이자 뛰어난 외교관이요, 국난을 구한 대문장가이자 시서화 삼절에 빛나는 대예술가였다. 그는 험난했던 시절에 그의 생애마저도 영화롭고 명예로운 일생을 마쳤으니 그가 죽자 공민왕은 그에게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내리고 왕의 묘정(廟庭)에 배향토록 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가 그린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와 <현우실적도(賢右室蹟圖)>4폭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그림들은 비단에 그려진 것으로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그림들이자, 고려시대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그림이 되고 있다. 호복(胡服)을 입은 다섯 사람이 말을 타고 얼어붙은 겨울 강을 건너가고 있는 장면을 그린 <기마도강도>는 비단 위에 수묵과 담채를 써서 그렸는데 다섯 필의 말과 인물, 절벽과 소나무, 강줄기와 눈 덮인 산줄기 들이 훌륭한 구도를 이루며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이제현의 비범한 그림 솜씨와 당시 고려회화의 드높았던 수준을 함께 읽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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