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대규모 대마도 정벌
역사상 최대규모 대마도 정벌
  • 백운신문편집부
  • 승인 2005.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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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3천여명 참수, 大양평인 이순몽장군

세종원년 전함 270척, 군사 1만7천여명 이끌고

왜선 154척 격파  …  억류인 169명 구출 위엄

 

  독도 영유권 문제와 일본 교과서 왜곡문제가 전 국토를 휘감았을 때 양평군민은 양평군민회관과 양동역 광장등 곳곳에서 일본 규탄 시위를 벌이는등 더 한층 분노를 표출한 바 있다.

 

  일본에 맞서 구한말 전국 최초로 을미의병을 창의한 우리고장출신 김백선, 이춘영, 안승우의병장들의 후예답게….

 

  특히 독도문제가 한일외교 문제로 비화됐을 당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억지 주장에 흥분한 일부 국민은 ‘대마도 또한 우리 땅’이라고 맞불을 놓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같은 주장은 정말 ‘근거’가 전혀없는 분노의 표출에 불과한 것일까.  또 그 옛날 양평출신 우리 선조들은 양평에서만 목소리를 높였을까.  물론 아니다.  조선초 우리고장 출신 이순몽장군이 직접 나서 대마도를 정벌했다는 통쾌한 역사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가 옛날 우리 고려의 땅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문헌뿐 아니라 일본의 문헌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첫째, 일본 불교의 천태종 승려 현진(懸眞 : 겡싱)의 저서「사가묘략기」에 ‘대마도는 고려의 목(牧)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목은 고려의 행정구역의 한 지칭이다.

 

  둘째, 세종 원년(1419년) 대마도를 정벌할 때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는 본래 경상도 계림(현 경주)에 예속되었으며 우리 땅이라는 문적(기록)도 있다’고 문헌에 남아 있다.

  이밖에도 대마도는 고려에서 만호(萬戶)라는 지방관을 파견, 다스렸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마도(쓰시마)란 이름은 언제부터 불리워진 것일까.  대마도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일본의 고대어는 한국어’란 저서를 공동집필한 김인배ㆍ김문배교수는 ‘거친 물결에 실려 가다가 물너울이 사그러 지면서 서는 섬’이란 뜻의 ‘서섬(섯음, 멈춤)’, ‘서서마’, ‘서시마’로 변청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어 ‘시마’란 우리 말로 ‘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백제계ㆍ신라계ㆍ가라계등 한반도 세력이 지배하던 ‘왜’가 서기 669년경(신라 문우왕 1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70여회에 걸쳐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다.  이른바 ‘왜구’의 출물이다.  조선조 초기 해적근성을 버리지 못한 ‘왜구’의 출물이 잦자 태조 이성계는 김사형등에게 대마도를 정벌토록 하여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나 이후에도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자 세종 원년(1419) 6월 8일 재차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이때 바로 양평출신 이순몽장군(1386∼1449)이 우군우절제사로 삼군도제찰사 이종무장군의 선봉으로 대마도 정벌에 참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순몽장군이 이끌었던 대마도 정벌군은 선막 270척과 군사 1만7285명, 그리고 군량이 60일분이었다.  이장군은 해상의 역풍을 만나 거제도로 회귀하는등 25일간의 천신만고 끝에 1419년 7월 2일 오시9낮11∼1시)경 대마도에 상륙, 왜선 139척을 빼앗아 사용 가능한 44척을 제외하고는 불태우고 집159채를 소각하였다.  또 왜구 163명을 참수하고 중국인 146명을 구출하였다.

 

  또 선단을 투지포(쓰지우라)로 이동, 인가 68동과 적선 15척을 불태우고 왜구 9명을 사로잡았으며 중국인 포로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특히 이순몽장군이 이끄는 조선정벌군은 병마사 김효성, 중군병마부사 이예등과 함께 북을 치며 적을 벼랑으로 몰아붙여 최종 3000여명의 왜구를 전멸시켰다.

 

  그러나 삼국도제찰사 이종무장군이 전세를 몰아 대마도 전체를 정벌하려다 지형에 익숙치 못해 2500여 아군 사상자를 내고 개전 14일간에 정벌군을 이끌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년 12월에 왜국 사신이 와서 사과하고 상호 수호할 것을 간청하자 세종대왕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회유책으로 제포(웅천), 부산포, 염포(울산)을 개항, 무역을 허락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포개항이다.

 

  양평출신 이순몽장군은 이후 세종 4년(1422)에 중군절제사도 여진족토벌에 나섰으며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절제사, 영중추원사에 올랐다.  묘역은 개군면 공세2리 속칭 무술마을 야산 서편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조선통신사 사하, 대마도도 한국땅(김화홍), 대마도를 다시본다(이병준), 일본 도내문화, 양평군의 역사와 문화유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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