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 민족대표 박동완선생
3ㆍ1운동 민족대표 박동완선생
  • 박현일
  • 승인 200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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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양평인가-포천인가 논란
양평의향지, 동아백과사전 양평으로 기록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박동완 선생의 출생지가 양평으로 알려졌으나 항간에는 포천이라는 설도 있어 고증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2000년 12월 양평군과 양평의 향지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양평의향지」에 따르면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366족을 인용, "민족대표 33인중 박동완도 역시 의향 양평출신이다"(양평의 향지 384쪽)라고 기술했고, "642쪽 양평군 항일독립운동 일람표에 독립선언문 낭독(파고다 공원)사건의 양평인 관련자 박동완, 40세(징역 2년)"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동아 세계 백과사전(13권 238쪽)에도 양평출신이라고 기록돼 있다.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던 박동완 선생은 1925년 <신생명>잡지 주간으로 취임한 이후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호를 '무궁화 골'이라는 명칭은 '근곡'으로 쓰고 평생 한복만을 고집할 정도로 민족 암흑기 민족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최근 포천 사학계에서 박동완선생이 포천 출신이라는 주장이 일어 논란이 되고 있다.  포천 사학계에 이르면 박동완 선생은 1885년 12월 27일 포천에서 민족의식이 강한 박형순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는 것이다. 위로 형과 누이가 있었고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다섯살때부터 독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고 열세살때 포천의 명문집 현석문의 딸(현미리암)과 결혼했다는 것.

 

  박선생이 17세 되던 1901년 서울로 이주 수학동에 정착, 양사동 소학교에 입학, 본격 신교육을 받았고 관립고등소학교,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 배제학당 대학부에 전입,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었다 한다.  따라서 이에대한 정확한 고증에 착수, 올바른 역사정립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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