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제대로 보자. 몽양 여운형
이제는 제대로 보자. 몽양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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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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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이 50여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일제하 항일 독립투쟁에 이어 해방 뒤 좌우대립의 대혼란 속에서 민족의 장래를 위해 남북합작에 온몸을 던지다 암살된 몽양. 나라의 독립과 통일국가를 만들기 위한 탁월한 식견과 실천력을 보여준 인물임에도 역대 정권으로부터 좌익인사란 딱지 속에 기피인물이었던 그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의 복권은 좌우이념의 대립과 갈등을 털어버리고 남과 북, 남남간에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자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지난해 12월16일 서울 도심의 한 음식점에서는 ‘몽양 여운형을 사랑하는 사람들’(이하 몽양사랑)이 조촐한 송년회를 열었다. 이날 모임엔 전창일(민족화합운동연합 상임공동의장), 김병태(한국농정신문 발행인), 이기형(시인), 조용준(민족일보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전무배(출판사 운영), 강준식(소설가), 김의홍(충남대 교수), 김명희(공인노무사)씨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그동안 몽양에 대한 서훈을 촉구해온 이들은 몽양 서훈이 공식화한 올해를 몽양사상 널리 알리기의 호기로 보고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몽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들뿐이 아니다. 학계는 물론 문화·종교계 인사와 일반인 등 다양하다. 몽양이 누구기에 세상을 떠난 지 58년이 지난 오늘날 새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몽양 여운형은 해방 직후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대중 정치인으로 꼽혔다. 이때 실시한 몇몇 여론조사에서 그는 항상 선두였다. 그와 관련된 전기, 평전만 10권 가까이 이르고, 수십 편의 학위논문이 발표됐지만 의외로 많은 국민은 그의 존재조차 모른다. ‘몽양사랑’ 회원 충남대 김의홍 교수(정보통신공학부·58)는 “내가 학교 다닐 때 교과서 어디에도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며 “그 후에도 이공계 공부만 하다보니 몽양을 몰랐고 최근 인터넷 사이트에서 우연히 알아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인 이기형씨는 “1988년 내가 몽양 전기를 쓸 때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몽양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어렵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몽양의 행적을 대별하면 일제하 항일 독립운동 및 공산주의 운동, 해방후 정치 및 남북합작운동을 한 인물이다. ‘몽양사랑’ 모임 사무국장인 강준식씨는 “활동이 자유스러운 해외에서 독립운동한 사람은 많지만 삼엄한 국내에서 건국동맹이라는 거대한 독립운동 실체를 이끈 사람은 몽양뿐”이라고 말했다. 또 좌우합작운동, 통일운동을 그만큼 앞장서 실행한 사람은 없다.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조선총독부, 미군정과 소련군정, 북한 김일성 등등 그가 만나 담판했던 대상은 당시 한반도 운명을 쥔 당사자들이다. 그러다보니 그에게는 너무나 다양한 평가가 뒤따른다. 목포대 정병준 교수(역사학)는 “여운형에게는 공산주의자, 민족적 민주사회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적 민족주의자, 민주적 자유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적용됐다”고 평가했다. 몽양의 일제하 항일투쟁 사실에 대해 학계는 물론, 남북 누구도 이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방후 몽양의 정치적 행보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최근 학계의 분위기다. 목포대 정교수는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그은 선으로 한국인의 월경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남북 정치인 누구도 남북을 오가며 평화통일을 얘기한 사람은 없었다”며 “하지만 여운형은 김구에 앞서 46년에만 5번 평양에 갈 정도로 남북통일을 염원했다”고 말했다. 뒤늦었지만 참여정부가 몽양을 서훈키로 한 것은 그의 항일 독립운동 및 건국의 공로에 대한 공식 인정 의미도 있지만 그에게 씌워진 빨갱이 굴레를 벗긴다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 이기형 시인은 여운형 서훈의 의미에 대해 “80~90년대 민주화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여운형의 복권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여운형의 서훈은 8·15 이후 애국과 매국이 180도 뒤바뀐 잘못된 현대사를 바로잡는 의미”라고 말했다. 몽양에게 항일투쟁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을 추서하는 것은 이제 몽양 재평가의 시작에 불과하다. 몽양의 항일투쟁 업적은 좌우익, 남북한 모두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젠 해방후 몽양이 전력을 기울였던 좌우익 통합, 남북한 합작에서 그의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 온전한 의미의 몽양 재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몽양 사후 58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민족에게 시급하고도 중대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원희복기자 wonhb@kyunghyang.com〉 - 여운형 연표 - ▲1886 경기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출생 ▲1914 중국 난징 금릉대학 영문과 입학 ▲1919 신한청년당 조직, 상해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1920 고려공산당 참가 ▲1922 김구 등과한인노병회조직 ▲1929 중국서 일본경찰에 체포 ▲1933 ‘조선중앙일보’ 사장 취임 ▲1936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 주도 ▲1942 일본 경찰에 체포 ▲1943 ‘조선민족해방연맹’ 조직 ▲1944 ‘조선건국동맹’ ‘농민동맹’ 결성 ▲1945·8·15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1945·8·16 건국치안대 조직 ▲1945·11·12 조선인민당 결성 ▲1946·2·9~ 5차례 방북, 김일성 등과 좌우합작 회담 ▲1946·2·15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1947·5·24 근로인민당 창당, 위원장 ▲1947·7·19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격,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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