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이 낳은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권오달씨
양평이 낳은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권오달씨
  • 김강윤
  • 승인 2001.09.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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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인데도 고속도로는 소통이 원활했다. 양평에서 전라도 익산까지 가는 길, 신봉균 발행인은 우리가 찾아가고 있는 사람과의 추억을 화제에 올렸다. 그러다가, 톨게이트를 잘못 빠져나와 1시간을 손해보고서야 익산에 닿는다. 추억은 가끔 현실의 방해요소라는 게 되새겨진다. 그런들 대수일까, 지난날은 아무리 험해도 그리운 시간인 것을. 발행인의 옛친구이자 대한민국 유일의 석불상 부문 석공예 명장(노동부 지정) 권오달씨(58세, 남강석재 대표)역시 유년기와 청년시절을 보낸 고향, 양평 이야기가 길다. "어려서는 하루 한끼 먹기도 쉽지 않았죠. 밥 때되면 남의 집 기웃거리는 게 일과였는데, 특히 이 친구집 신세 많이 졌죠. 그리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다른 집처럼 눈치를 주지는 않습디다." 권오달씨는 말끝에 웃음을 달며, 옛친구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신봉균 발행인은, 친구네가 째지게 가난했지만 출중한 가문이었음을 간추려준다. 조부께서 원주목사를 지낼 만큼 대대로 내놓아라 하던 용문면 삼성리 권씨 집안이 몰락한 것은 해방 이후 실시된 토지개혁의 결과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토지개혁의 주축인물은 양평출신의 몽양 여운형선생이었고, 게다가 권오달씨의 백부 권영선씨는 몽양의 둘도 없는 동지였으며 벗이었다고 한다. 또한 권오달씨는 몽양과 백부를 깊이 존경하고 있다. "배곯는 일이야 그 시절 사람이 다 겪은 거고, 한 집안이 망해서 여러 수십 집이 살게 된다면 그 또한 유익한 일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빠르게 잊혀져 간다는 게 섭섭할 따름이죠." 권오달씨는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잔뼈가 여물기도 전부터 세상에 나선다.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도 지어보고 종묘사업에도 뛰어들어보지만 도통 밝은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가다가 참한 색시에게 장가를 든다. 가진 것 없는 청년이 참한 색시를 얻는 일만 해도 운수대통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일반인데, 참한 데에다 그 시절 여인네에게는 드문 용기까지 겸비했으니 본인 말마따나 '순전히 조상님 덕'이다. "말 그대로, 솥단지 하나 수저 두 개로 신접살림을 시작했어요. 허구헌날 몸 부서져라 일했지만, 사는 건 늘 제자리였죠. 그렇게 한 1년 지냈나, 집사람이 할말 있다고 하구선 한참 동안 내 얼굴만 뚫어져라 보더니 입을 엽디다. 당신은 머리도 좋고 성실한 사람이니까, 기술을 배워야 한다면서, 자리 잡을 때까지는 어떡하든 자신이 살림을 꾸려나갈 테니 서울로 가자구요." 서울 생활은 더욱 고달팠다. 날품팔이로 시작해서 건축관련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겪은 고통은 고향에서의 고달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석재공장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한 건축주가 자처해서 자신의 친구에게 소개를 한 덕택이다. 그때 나이가 스물 아홉, 죽기살기로 새로운 세상에 도전한다. "돌일이라는 게 매일같이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야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일과를 마치면, 다들 선술집으로 몰려갔죠. 돼지비계며 곱창 따위 싸구려 육질에 배를 채우고 독주에 취해 곯아 떨어져야 다음날 일할 힘이 억지로라도 생겼기 때문입니다. 나도 몇 달은 그렇게 살았죠. 그러다가, 이대로 가다간 평생 이렇게 살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날부터 술집 걸음은 작파했습니다." 권오달씨는 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다. 석공예에 관련된 분야는 물론 일본어까지 독학으로 웬만한 수준에 오른다. 하루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은 노력의 결과이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이윽고 기회가 찾아온다. 전라도 익산에서 일본어가 가능한 석공을 찾고 있는지 오랜데, 적합한 사람이 없어 주인이 애태우고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된다. 일본인들은 석물(石物)로 정원을 치장하는 걸 즐기는데, 국내 제품이 상대적으로 월등히 값도 싸고 작품수준도 높다는 게 알려져 국내 석재상을 찾는 일본인의 발길이 부쩍 늘던 무렵이었다. 권오달씨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석재주인의 대환영 속에 익산에 첫발을 딛는다. 32살 되던 해의 일이다. "월급은 전보다 몇 배 올랐지만, 겨울엔 일이 없었어요. 해서, 겨울이면 저 혼자 공장에 나와 석공예품을 만들었죠. 언손 호호 불어가며 망치질하고 정으로 쪼아낸 소품들을 주변사람들 권유에 떠밀려 경진대회에 출품하게 되고, 운이 좋아 상을 받기까지 이르렀습니다."그 뒤부터는, 까다로운 물건은 '권오달'에게 가보아라, 가 익산 석재상들의 공통의견이 되었다. 그에 힙 입어 '78년 지금의 남강석재를 창업하게 된다. 사업은 순조로워 곧 석공 80여명을 거느리는 익산의 대표적인 석재상으로 성장한다. 그럼에도 잠은 하루 4시간을 넘기지 않는 자신만의 불문율은 엄격히 지켜, 사업에 동분서주하면서도 '93년 원광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수료한다. "불심이 담기지 않은 석물은 그저 돌덩이일뿐입니다. 돌을 깎고 다듬어 혼을 불어넣는 작업은 참된 수양과 득도의 또 다른 길입니다. 비록 제가 승복을 입진 않았지만, 돌을 다룰 때만큼은 승려의 도리를 꼭 지킵니다." 화엄사, 백양사, 금산사, 대흥사, 마이산 탑사 등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 곳곳마다 권오달씨의 작품이 자리잡고 있다. 가까이로는 경복궁내 한국민속박물관 12지상이 대표적이다. 국가적 기간사업 기념물로 조성된 것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박정희 전대통령이 직접 제막한 삽교천 기념조형물이 기억에 뚜렷하다 한다. "다들 알다시피, 故박대통령은 79년 10월 26일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하고 그날 밤 서거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미 며칠 전에 뭔가 커다란 국가적 변고가 있으리라는 걸 예감했습니다. 삽교천 조형물이 물개 세 마리 형상을 변형한 작품이었는데, 납품 이틀 전에 그야말로 귀신 곡할 일이 벌어졌죠. 간밤에도 멀쩡했던 작품이 아침에 나와보니까, 모가지가 셋 다 댕강 잘라져서 무릎 아래마다 가지런히 놓여 있더라구요. 절단된 면이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의 짓이 아니에요. 돌덩이를 그렇게 면도날로 벤 듯 자를 수 있는 기계나 솜씨는 세상의 것이 아니거든요. 부랴부랴 접착을 해서 삽교천에 옮겨놓고 그저 부처님께 평안을 빌었죠." 그밖에도 전하고 싶은 일화가 숱하지만, 한정된 지면에 다 옮길 수가 없어 무척 아쉽다. 매년 익산에서는 '돌문화축제'가 열린다. 5년전 첫해부터 줄곧 축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오달씨는 현재 모교대학에서 석공예 강의를 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가장 중히 내리는 가르침을 마지막 질문으로 묻는다 . "지금 불상은 우리나라 불상이 아닙니다. 중국불상은 엄격한 표정이 특징이고 일본 불상은 웃는 표정이 특징입니다. 본디 우리나라 불상은 희노애락을 골고루 담고 있는 표정으로 그들과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슬픔을 달래주고 즐거움을 북돋아주고, 성냄을 다독거려주고 사랑을 키워주던 그 깊고 깊은 표정이 지금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 잘못은 석공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가짐에서 자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부디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이 세상에 다시 자비를 꽃피우는 훌륭한 스님이 되시기를 염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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