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주년 3.1절을 맞으며
제96주년 3.1절을 맞으며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15.02.28 13: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절 맞아 일제강점기 악명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반드시 복원논의 돼야,

 
정부도 3.1절 계기로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바른인식 가져야,일제강점기 나라 찾겠다고 나선 항일독립운동, 체포 악명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옥사로 한 많은 인생 접어야 했으며, 3.1절을 맞는 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눈물 마르지 않아 애태우며 지켜봐야 하는 현실이 고독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금년이3.1운동 제96주년이자 광복 70주년인데, 독립운동가 후손 정병기 증손자 38년째 ''고투'' 그래도 그 노력 멈추지 않을 것이다, 3.1절과 광복절이 돌아오면 기쁨보다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일제강점기 독립과 광복위해 똑같아 목숨을 받치고도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이런 현실에 70주면 광복절을 맞는다. 많은 것을 생각해 한다. 진정한 독립유공자는 아직도 암흑 속에 묻혀 잊혀지고 잃어버린 애국으로 버림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악명 높던 경성형무소 옥사기록 제시해도 거증자료 더 찾아오라고 하는 국가보훈처정부는 행사 때 마다 나라위한 희생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고 하는데 그 현실은 현실과 많은 거리가 있다고 눈물 흘린다.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마포구 공덕동 소재 서부지방법원. 검찰청)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38년째 지루하고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정병기(58)씨. 당시 독립운동은 목숨 밖에 놓고 다니는 운동이다.

 
그는 ‘광복 70주년’이고 31독립운동 제96주년, 일제의 침략만행으로 한.일 강제병합 105주년의 치욕적인 올해도 어김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단서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부양할 가족도 있고 몸도 성치 않지만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증조부와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다. 정병기 증손자는 “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옥사기록 담긴 제정호적 제출하면 되었지 그 무엇을 더 내놓으란 말인가.? 정부는 발굴노력으로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지 반문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병기 증손자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

 
증손자 정병기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정부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소각하거나 관보 지시로 없애버리고 후손들에게는 자료를 요구하는 현실이 앞. 뒤가 맞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헤ㅐ서 후가를 가야만 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집안은 당시 감시대상이고 일제의 탄압과 고문에 버티기 힘들어 풍비박산되고 집안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국가보훈처는 물론 국가권익위원회 청와대에까지 서류를 안 내밀어 본 곳이 없지만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그는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난해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정병기 증손자는 일제강점기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 정부의 잘못된 명령을 내렸던 관보도 찾았다. 정부는 이분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말도 없는 현실이다,

정용선 선생의 아들 정덕수 할아버지는 일제의 모진감시와 탄을 피해 탄광에서 일하다 폐병으로 숨졌다. 증손자 정병기 자신은 경찰애서 근무하던 지난 1980년 강도 살인범을 붙잡다 부상을 당했다. 당시 후유증에 간경화로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정부나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를 찾는 일을 후손들에게만 떠넘기는 정부가 야속하지만 어디엔가 분명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있을 거라 믿는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정부만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3월과 8월에만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정부가 일 년 365일 내내 나서야 한다고 본다. 이 문제는 정말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반드시 증조부의 나라 찾기 위한 항일독립운동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믿고 정부도 그런 바른 인식을 갖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하며 그 당시 악명이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는 정부가 나서 역사관 건립을 서둘러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나라사랑의 진정한 산실이고 역사의 현장을 복원 일제의 잔악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전하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역사의 현장이 되기를 아울러 바란다.

글쓴이/정용선의 증손자<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