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을 경운궁으로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라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라
  • 김민수
  • 승인 2009.02.26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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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을 경운궁으로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라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전 앞에 고종황제 동상을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단군(檀君)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였다.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남으로 탐라국(耽羅國: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하는 지라. 탐라에서 말갈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시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백악(白嶽 북악산)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 1899년 8월 17일 반포된 대한국 최초의 헌법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으며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대한국 황제의 육해군 통수권,계엄령 발포권,법률 제정·반포권,문·무관 임명권,조약 체결·선전·강화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대한국(大韓國)은 고종황제가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황제는 오전 2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경운궁 대안문부터 환구단까지 좌우로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황색 의장으로 호위하였는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고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으며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대한국을 선포한 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황제는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낮 12시에 황후를 책봉하고 2시에 황태자를 책봉하였다.



1873년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1887년 최초로 전등 점화하여 전기를 사용한 건청궁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한 고종은 대안문(大安門) 앞 환구단에서 자주 독립을 천명하고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하였으며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독도 대마도 녹둔도를 아우르는 4천리 영토를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와 애국가를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光復)운동을 적극 지원한 고종황제를 5만원권 화폐 도안 인물로 재선정하고 경운궁 앞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여야 하며 황토현의 기념비전 앞에 고종황제 동상을 건립하여야 한다.





1919.3.1 대한국 광복과 대한국인의 자주민 선언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1904년 2월 대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고종황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22일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영국과 영일동맹,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대한국 독점지배에 관한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으며 1906년 2월 한성에 설치한 통감부는 1909년 만주이권 장악을 위해 고종황제가 비준하지 않아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총독부 독살에 의해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하셨는데,2·8 대한광복선언,경운궁 대안문·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전·보신각·원각사지앞 '3·1 대한광복운동',대한국 상해정부 수립의 배경이 되었고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강제로 양위당한 고종황제는 정미독립운동,대한인국민회,대한독립의군부,대한광복군정부 등 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으며,'신한혁명단'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광복운동을 활성화하려 하였고,고종황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재일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선언하고 이광수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백관수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대한 병탄이 한민족의 의사와 반하는 것이므로 대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한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며 한민족의 대한국 광복운동을 촉구하였다.



대한광복운동가들은 1918년 말 길림에서 무오 대한광복선언을 통하여 대한국의 광복을 주장하였고,재일 유학생의 2·8 대한광복선언의 영향을 받은 3·1 대한광복운동은 총독부에 의한 고종황제 붕어(崩御)로 인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대한국 병탄(倂呑)과 무단통치에 저항하는 평화적인 광복운동이었으나 총독부는 서울,화성,천안,대구,합천,마산,익산,남원의 광복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919년 1월 21일 일제 총독부에 의한 대한국(大韓國) 고종황제의 붕어(崩御)는 2·8 대한광복선언,3·1 대한광복운동,6·10 대한광복운동,11·3 대한광복운동,대한국 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대한국 상해정부를 비롯한 대한국 광복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국의 수립,대한국의 통일을 위한 한민족공동체의식으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병탄(倂呑)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광복(光復)을 하였다.





국립박물관 문화재관리소 직급,정원 조정 직제개편을



문화재관리 기능 강화 위한 통합 문화재청 출범해야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헌법,정부조직법,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문화재관리 사무를 관장,총괄하는 문화재청은 법적,제도적 조치를 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를 사전적,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고 있으므로 문화재청의 문화재 관리 정책 총괄,지휘 감독,법령 기획,제도 개선,교육 홍보 기능을 강화하하기 위하여 국유문화재 관리기관인 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을 직급·정원 조정하여 문화재청으로 이관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문화재관리 정책 연구,법령 기획,제도 개선,교육 홍보 및 지방자치단체,책임운영기관,발굴법인,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 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하며 매장문화재발굴조사법인,국가지정문화재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굴 조사,보수 복원,실측 설계,전시 기획 기능이 완벽하므로 문화부로부터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을 이관받고 고궁박물관(경복궁 본관/경운궁 분관),왕실문화재관리소,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해양박물관,한국전통문화학교로 직제개정하여야 한다.



문화재관리 행정전문성 강화를 위한 문화재관리학 창학,공무원 특별채용 약속과 대규모 학예연구직,별정직 공무원 정원 증원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고고학,미술공예,인류민속,서지역사,전통건축,보존과학 전문인력을 수 백명 특별채용한 문화재청은 정책 연구,제도 개선,법령 기획,규칙 관리,교육 홍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문화재개론,문화재법학,문화재정책론,문화재법제론,문화재관리론,문화재활용론의 문화재관리학을 전공한 전문인력을 학예연구직,별정직,전문계약직 공무원으로 특별채용하여야 한다.



문화재 관리체계를 전문화,특성화하고 왕실문화재,지역 연고,국가 귀속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고궁박물관은 경운궁 분관을 신설하고 민속박물관은 이전하여야 하며 문화재는 조직,인력에 의한 사전적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므로 고궁,민속,해양,서울,경주,대구,김해,진주,전주,광주,공주,부여,청주,제주,춘천박물관의 직급,정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특성과 지역 연고에 따라 문화재를 이관하여야 하며 궁관리소,왕릉관리소를 통폐합하여 경운궁에 왕실문화재관리소를 신설하여야 한다.



문화재는 보존공물로서 사람처럼 멸실,훼손되면 재생이 불가능하므로 소유,지정과 관계없이 공용제한을 받아야 하며 문화재청이 국보급 문화재의 관리를 지자체,법인,대학,단체에 위임,위탁하거나 개인이 소장하는 것은 적법,타당하지 않으므로 문화재청은 국보급 문화재를 소속기관으로 이관,귀속하여 중점 보호하여야 하며 무자격 수리,무허가 반출,도굴,손상,절취,은닉,방화,위조,파괴,일수 등 문화재사범의 죄형을 세분화하고 형사처벌,행정처분을 강화하여 사전적,예방적,적극적,능동적으로 관리하여야 한다.





경운궁 태극전 개칭하고 환구단 원형 복원하라



고궁박물관은 대한국 영광의 역사를 전시하라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을사늑약,경술늑약에 의해 설치된 통감부,총독부,경성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원묘,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 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교육기관,기록기관과 일본,프랑스,북한이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순종황제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설립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 후 총독부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국외로 불법 반출 후 환수,교육기관·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고문서·고지도·사진 등 황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고 통치체제(도성·궁궐 지도,사진),대외관계(태극기,KOREA,독도·간도 지도),왕실의례(환구제,사직제,종묘제)를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전문가,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일제 총독부는 백악산 경복궁 북원에 총독관저를,신무문 앞 건청궁에 총독부박물관을,흥례문에 총독부를,환구단에 철도호텔을,목멱산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하고 통감부 일본신사를,경희궁에 일본인학교를,창경궁에 동물원을,경운궁 궁내부 대안문을 철거 이전하고 경성부를 악의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문화재청은 경운궁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청사,서양미술관을 철거하고,고종황제 편전 석조 전각에 고궁박물관 경운궁 분관을 개관하여야 하고 황궁우 석고단과 경운궁 대안문 사이에 환구단을 복원하여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일반에 공개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한 황실 궁내부,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황실사무청,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관리국을 계승한 문화재청은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중점보호하고 경운궁 궁내부 원수부 선원전 흥복전 흥덕전 의효전 경복궁 융문당 융무당 경농재 대유헌 벽화실 지선실 의정부 한성부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기로소 6조 인경궁 사직서 내시부 체부청 종친부 장생전 종부시 사간원 규장각 소격서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상의원 5위도총부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별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장충단 보신각 기념비전 돈의문 숭례문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 철거하고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조선 왕실의 출생의례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조선의 국왕과 왕비는 침전이 구분되어 있었고 아기를 수태(受胎)할 길일을 받고 하늘과 땅의 만남을 상징하는 합궁(合宮)을 하였으며 한달에 한번인 길일은 제조상궁, 관상감에서 초하루 그믐 보름 뱀날 호랑이날을 피해 택하여 올리며 길일이라도 일기가 안좋으면 역시 피했고 합궁하는 날에는 나이 많은 상궁 2 명만 침소를 지켰다.



태교는 성현의 교훈을 새긴 옥판을 보고 그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아침을 맞이하였으며 임신 3개월부터 어지러운 바깥 세상과 소식을 끊고,심지어 왕과도 편지로 연락하며 음식의 단맛도 경계하고 피리 독주도 피했고 처소에는 늘 정숙을 유지해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몸치장에 신경을 썼다.



5개월부터 낮에는 당직 내시,밤에는 상궁나인이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 등을 낭독하였고 7개월부터는 육선(肉膳)을 피하고,콩으로 만든 음식,각종 채소와 해산물이 상에 오르게 되며,산모는 불로장생하는 생물과 자연물을 그린 십장생 병풍을 보며 자수와 누비옷을 만들며 마음을 안정시키고 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민간의 풍습으로 내려오는 모로 눕거나 엎드려서는 안되며 서러운 울음소리, 소란한 소리, 애처로운 벌레소리, 잡스러운 소리를 들어서도 안되고 해산달에는 머리를 감으면 안된다는 등의 주술적인 내용의 태교법인 칠태도(七胎道)라는 신분이 높은 집안의 임산부가 지켜야 할 7가지 규칙을 지켜야 하였다.



출산전담기관으로 왕비와 세자빈을 위한 산실청(産室廳)과 후궁을 위한 호산청(護産廳)을 두었는데 산실청은 중전의 경우 3개월 전에 설치하며,산실청 설치 기간에는 형벌 집행을 하지 않고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산실청을 폐지하였다.산실청은 출산과정을 총괄할 도제조와 권초관을 임명하고 내의원의 3제조 등이 배속된다.



산기가 있으면 산실청에서 산실을 꾸미는데 산실은 산모의 안정을 위해 평소 거처하던 방으로 정했으며 순조로운 출산을 위하여 최생부(催生符)를 북쪽 벽에 붙였다.산자리를 깐 후에는 태의를 둘 방향에 주사로 쓴 부적을 붙인 후 의관 차지내관이 차지법(借地法) 즉 순산할 자리를 귀신에게 빌린다는 의미의 주문을 외워 귀신들이 악신을 물리칠 것을 부탁하였다.



의관은 왕의 윤허(允許)를 얻어 왕비의 성을 부르며 왕손의 출생이지만 귀신에게 도움을 얻어야 했다. 달이 바뀌면 길한 방향이 바뀌기 때문에 산자리를 달의 덕을 볼 수 있는 길한 방향으로 돌려놓았다.산자리는 산모의 머리가 달이 떠오르는 방향을 향하도록 설치하였다.



산기가 있으면 산실에 삼신상을 차려놓고 순산을 빌었다. 왕비가 출산하면 국왕은 구리종을 쳐서 아기의 출생을 알리고, 출산 직후에 산실청에서 권초(捲草)를 하고 벽에 붙여둔 최생부를 떼어 불살랐다. 원자, 원손이 탄생한 지 3일째 되는 날 국왕은 종묘에서 선대 왕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7일째 되는 날 왕은 대신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축하 연회를 성대하게 베푸는 진하(進賀)를 거행하였다.



왕자가 출생하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길일(吉日)·길지(吉地)를 택하여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태를 묻게 했는데 태실(胎室)은 대석(臺石)·전석(磚石)·우상석(遇裳石)·개첨석(蓋檐石)으로 구성되었다.관찰사(觀察使)가 왕·왕비·왕세자(王世子)의 태실을 살피게 하였으며 대왕태실의 경계는 300보(步), 왕세자의 태실은 200보로 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으며 태실의 설치는 군현(郡縣)의 위상과 관련있었다.





대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한 대한 황실 궁내부



근대적 광무개혁을 주도한 대한 황실 궁내부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궁내부(宮內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신설되어 왕실 행정을 일반 행정과 완전히 분리하여,왕실 업무를 궁내부가 총괄하였으며 궁내부의 수장은 궁내부 대신이 맡았다.1899년 광무개혁을 통해 의정부를 정책 결정 기구로,궁내부는 집행부로 삼아 대한국의 양부 체제를 갖춘 이후 대한국 고종황제가 근대화와 관련된 사무를 궁내부에 관장시켜 광무개혁을 주도하게 하여 궁내부가 확대되었다.



황후에 관련된 일을 맡은 황후궁(皇后宮),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侍講院),황제의 손자를 교육하는 강서원(講書院),황태자비에 관한 일을 맡은 황태자비궁(皇太子妃宮),황자의 보익(輔翼),시강,호종(護從) 사무를 맡아보던 친왕부(親王府),황가의 사무와 회계 사무를 맡아보던 황족가(皇族家),황족의 자제를 가르치던 종인학교(宗人學校),황제의 호위를 맡은 호위대(扈衛隊)가 있다.



원구단의 일을 맡아보던 원구단사제서(圓丘壇司祭署),종묘를 관리하는 종묘서(宗廟署),사직단(社稷壇)을 관리하는 사직서(社稷署),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어진(御眞)·어제(御製) 어필(御筆)과 왕실의 전적,도서의 모각(模刻) 등사(等事)를 관장하던 규장각(奎章閣),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문한(文翰) 처리, 황제 자문하는 홍문관(弘文館),의식과 제례(祭禮),외국사절의 인접(引接)을 관장하던 장례원(掌禮院)이 있다.



황제의 진찰과 어약(御藥)의 조화(調和)를 맡아보던 태의원(太醫院),시종(侍從)과 시강(侍講)사무를 관장하는 시종원(侍從院),황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아본 비서원(秘書院),황실 경비의 예산·결산을 맡아보던 내장원(內藏院),황실의 예산 및 지출을 맡아보던 회계원(會計員),황실의 계보 일을 맡아보던 종정원(宗正院),황제의 친척 ·외척에 대한 보첩(譜牒)을 관장한 돈녕원(敦寧院)이 있다.



궁궐을 경비하는 경위원(警衛院),외국과의 왕복 서류 번역을 맡아보던 예식원(禮式院),국내외 서적 보관하는 박문원(博文院),도량형 업무를 관장하던 평식원(平式院),외국여행을 관장한 수민원(綬民院),관개(灌漑)·관수(灌水)를 맡은 수륜원(水輪院),황실 토지 개간,종식(種植)•천택(川澤)•강해(江海)•제언(堤堰)•어렵(漁獵) 및 황제 진상품을 담당한 어공원(御供院)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던 비원(秘院),황실 제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철도 업무를 관장하던 철도원(鐵道院),한성과 신의주 간 철도 부설을 위하여 설치한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제사(祭祀)와 시호(諡號) 일을 맡아보던 봉상시(奉常寺),궁중의 연회·음식을 맡아보던 전선사(典膳司),황제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보물을 관리하는 상의사(尙衣司)가 있다.



전각 수리를 맡은 주전사(主殿司),황실의 토목,건축,영선을 맡은 영선사(營繕司),궁중 물품 구입,건물 수리하는 물품사(物品司),황제가 타는 말과 수레를 관리하는 태복사(太僕司),전화와 철도 일을 맡은 통신사(通信司),식료품 및 특산물 사무를 맡은 제용사(濟用司),사찰과 산림,성보(城堡)사무를 맡은 관리서(管理署),광산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광학국(鑛學局)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국왕 및 대한국 황제의 복식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조선 국왕의 대례복(大禮服)인 면복은 면류관,곤복으로 구성되어 있다.면류관은 사각형의 천판에 면류(옥구슬)를 매단 관(모자)이며 곤복은 중단,의,상을 입고 대대를 두르고 폐슬,혁대,패옥,방심곡령,수,말,석,규를 착용했고 장문이라고 해서 여러가지 무늬가 수놓이는데 조선 국왕은 9장문,대한국 황제는 12장문이다.



중단은 겉옷 안에 입는 옷인데 두루마기와 형태가 비슷하지만 소매가 넓으며 깃에는 불문이 금박되어 있다.의는 저고리,상은 치마,대대는 허리띠와 비슷한 것이다.폐슬은 허리부터 무릎 아래에 드리우는 사각형의 천이며 장문이 수놓아져 있으며 혁대는 품대로 허리에 두르는 사각형의 띠로 신분을 나타낸다.패옥은 허리에서 양 옆으로 늘어뜨리는 옥 장식이며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방심곡령은 둥근 고리 모양에 사각형이 매달려 있는 형태로 가슴에 늘어뜨린 것이다.수는 후수라고도 하며 허리에서 뒤쪽에 늘어뜨리는 띠이며 품계에 따라 문양이 다르며 말은 버선을 말하며 석은 신발을 말하고 규는 손에 드는 옥판인데 위는 삼각형 모양이고 아래는 네모지다.



국왕이 면복을 입으면 왕비는 그에 맞추어 적의라는 의복을 착용한다. 적의는 대례복(大禮服)으로서 활수대의(闊袖大衣)의 포제(袍制)에 속하는 적의와 중단(中單) ·상(裳) ·폐슬(蔽膝) ·대대(大帶) ·혁대(革帶) ·옥패(玉佩) ·수(綬) ·말(襪) ·석(舃)을 착용하고 규(圭)를 든다.



조복은 왕과 문무백관들이 설날, 동짓날의 하례, 의식에 착용하던 예복으로 신하들이 입는 백관복 가운데 가장 화려한 옷으로 금관을 같이 쓴다고 해서 금관조복이라고 한다.왕의 조복은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는데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원유관이 황제가 착용하는 통천관으로 바뀌게 된다.



포는 붉은 강사 또는 홍단으로 만들었는데 깃,도련,소매 끝에 붉은색 선을 두르며 중단은 백초,백라,백사 등의 비단으로 하며 붉은 색 깃에 불문을 그린다.폐슬,대대,패옥,수,규,방심곡령 등은 면복과 동일하며 말은 흰색,석은 흑색이다.



왕비의 대례복인 황원삼(黃圓衫)은 다홍색과 남색 색동 끝에 흰 한삼을 달았고,비빈의 대례복인 홍원삼(紅圓衫)은 자적색(紫赤色) 혹은 다홍색 길에 노랑색·남색 색동 끝에 흰 한삼을 달았다.공주,옹주의 대례복인 초록원삼은 연두색 길에 다홍과 노랑 색동 끝에 흰 한삼을 달았고 가슴에는 봉(鳳)흉배를 달았다.큰 띠에는 금박문양을 넣었는데 황원삼에는 용문(龍紋)을,홍원삼에는 봉문(鳳紋)을,초록원삼에는 화문(花紋)을 넣었다.



1895년 을미개혁으로 단발령과 함께 제도적으로 양복이 공인되었고 1899년 외교관의 복식을 양복화하였으며 1900년 문관의 예복을 구미식으로 바꿔 대한국의 관복제도가 양복화되었다.관복이 양복화됨에 따라 상류층은 양복을 입기 시작하였으나 일반인들은 한복을 착용하였다.





칭경식 의전용으로 수입한 고종황제 어차(御車)



대한국(大韓國) 최초의 차 고종황제 어차(御車)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대한국(大韓國) 고종황제는 1903년 어극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칭경식(稱慶式)'을 전통예술극장인 광무대(光武臺)에서 열었으며,경운궁부터 광무대까지 행사 이동시 사용할 포드 또는 캐딜락 승용차 1대를 칭경식(稱慶式) 의전용 어차(御車)로 수입을 지시하였다.



궁내부는 알렌 미국 공사를 통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자동차 판매상 '프레이저'로부터 포드의 A형 4인승 무개차 1대를 수입하였다. 알렌 미국 공사는 1884년 대한국에 와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최초의 서양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신임을 받고 고종 황제의 주치의를 지냈다.



인천항에서 하역하고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를 이용하여 1902년 개통한 한강철교를 건너 한성역에서 내려서 경운궁까지 가야 했으므로 칭경식이 끝난 후에 도착하고 황제의 행차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데,차가 시끄럽게 소리나고 빨리 달려 황제 행차에 사용하지 못하였다.



1908년 황실용으로 수입되었던 2 대의 차가 최초의 어차가 되었는데 한 대는 고종 황제용 영국제 흑색 다임러 리무진이고, 다른 한 대는 순종 황제용 프랑스제 적색 르노 리무진이었다. 1910년 한 대를 더 수입한 차가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캐딜락이다.



고종황제가 어차를 타고 행차했다거나 일반인들이 행차장면을 목격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경술늑약(庚戌勒約) 이후인 1911년부터 순종 황제가 캐딜락 리무진을,순정황후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을 탔으며,의친왕(義親王) 이강 공은 미국제 오버랜드를 애용했다고 한다.





4대문 안 역사문화경관 원형복원이 6백년 서울의 꿈



서울시는 대한 황도 역사문화경관 원형 복원하라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1395년 태조가 조성한 법궁 경복궁(景福宮)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는데 궁궐 4문 중앙에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 근정전(勤政殿),왕의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대전 강녕전(康寧殿),중궁전 교태전(交泰殿),동궁전 자선당(資善堂),세자가 학문 강학하는 비현각(丕顯閣),세자의 사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대비전 자경전(慈慶殿),집현전(集賢殿) 수정전(修政殿)이 있다.



북편에는 고종이 친정을 한 건청궁(乾靑宮),사신 접대,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齋),내전 흥복전(興福殿),만경전(萬慶殿),집경당(集慶堂),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왕 장례시 관을 모셔두는 빈전 태원전(泰元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혼전 문경전(文慶殿),국상시 사용하는 회안전(會安殿),육상궁·연호궁·덕안궁·경우궁·선희궁·대빈궁·저경궁 등 후궁 신위를 봉안한 칠궁(七宮)이 있다.



그리고,회의공간인 빈청(賓廳),대청(臺廳)과 어명 전달,관보 발행하는 승정원(承政院),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국정 자문,간쟁하는 홍문관(弘文館),문서 제술,사초 기록하는 예문관(藝文館),어제 어필 보관,학술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국왕 학습, 국사 논의 위한 경연(經筵)시행하는 경연청(經筵廳) 등의 궐내각사가 있다.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門) 영추문(迎秋門) 밖에는 국정 총괄,관청 통제하고 의견 조율하는 의정부(議政府),어명에 의한 수사 및 심판, 탄핵에 대한 판결하는 의금부(義禁府),관직 및 법령 서경, 관리 탄핵,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관직 및 법령 서경,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직무 없는 당상관 우대하기 위한 중추부(中樞府),음식물 감독,왕명 전달,궐문 수직(守直),청소 등 궐내 잡무보는 내시부(內侍府),어명을 받아 장병 시찰 독려하는 체부청(體府廳),궁중 물자 공급, 연회(宴會)와 직조(織造) 관장한 내자시(內資寺)가 있다.



또,군무를 통괄하던 삼군부(三軍府),5위(五衛) 통솔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總府),도성과 외곽지역 방어하는 5군영(五軍營),왕의 계보 초상화 보관,왕과 왕비의 의복 관리한 종친부(宗親府),녹찬(錄撰)과 종실(宗室) 사무,왕실 족보 연구하는 종부시(宗簿寺),종친과 왕의 외척, 왕실 외손을 예우하는 돈녕부(敦寧府),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충훈부(忠勳府),왕이나 왕세자의 사위가 속한 의빈부(儀賓府),도교(道敎)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제사하는 소격서(昭格署)가 있다.



문관 인사,공신과 종친 관리하는 이조(吏曹)와 호구,인구 파악,통계 기록,재정 출납하는 호조(戶曹),교육,외교,문과 시행하는 예조(禮曹),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무관 인사,무과 시행하는 병조(兵曹),법령 담당,상급 재판 심리하는 형조(刑曹),모임 인허가 및 평가,물품 관리,토목 공사를 담당한 공조(工曹),서울의 수비를 담당하고 군인을 훈련 감독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무예 연습,병서(兵書) 강습하는 훈련원(訓練院),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천문(天文) 측후(測候) 각루(刻漏) 사무를 보는 관상감(觀象監) 등의 궐외각사가 있다.



연회공간인 경회루(慶會樓),후원 공간은 녹산(鹿山),향원정(香遠亭)과 신무문(神武門) 북편에 있는 오운각(五雲閣),옥련정(玉蓮亭),농사 기원하는 경농재(慶農齋),경농재 부속 공간 양정재(養正齋),문과 시행하는 융문당(隆文堂),융문당 부속 공간 춘안당(春安堂),무과 시행하는 융무당(隆武堂),과거 시행, 군사 훈련하는 경무대(景武臺)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경복궁 권역인 빈청 대청 정청 승정원 홍문관 춘추관 예문관 경연청 선전관청 5위도총부 상의원 궁궐 4문 앞 궐외각사(의정부 한성부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기로소 사간원 종친부 장생전 종부시 규장각 내시부 사직서 체부청 내자시 6조) 북원(융문당 융무당 경농재 대유헌)녹산 광화문 연지 어도 월대 해태상 서십자각을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대한 황궁 경운궁(慶運宮)은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종황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종황제 등극의례를 봉행한 태극전(太極殿),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1900년 기공한 고종황제의 편전 겸 침전 석조전(石造殿),황실 사무, 근대적 광무개혁 추진한 궁내부(宮內府), 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덕궁(昌德宮)은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행하는 정전(正殿) 인정전(仁政殿),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선정전(宣政殿),왕의 개인 생활,침식 공간인 대전(大殿) 희정당(熙政堂),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대조전(大造殿),세자가 생활하는 동궁전(東宮殿) 중희당(重熙堂),세자 학문 강학하는 성정각(誠正閣),세자의 서재 승화루(承華樓),세자의 사무 공간 시민당(時敏堂),부속 건물 진수당(進修堂)이 있다.



내전 경훈각(景薰閣),보경당(寶慶堂),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왕의 어진(御眞)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선원전 재실 양지당(養志堂), 대비전(大妃殿) 만수전(萬壽殿),부속 건물 영모당(永慕堂),연회 공간 영화당(暎花棠),서재 기오헌(寄傲軒),후원은 태극정(太極亭),소요정(逍遙亭),취한정(翠寒亭),농산정(籠山亭), 취규정(聚奎亭),부용정(芙蓉亭),애련정(愛蓮亭),청심정(淸心亭),승재정(勝在亭),존덕정(尊德亭) ,관람정(觀纜亭),농수정(濃繡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의례 공간인 정전 명정전(明政殿),국왕 사무 공간 편전 문정전(文政殿),강학 공간 숭문당(崇文堂),중궁전 통명전(通明殿),대비전 자경전(慈慶殿),세자 강학 공간 신독재(愼獨齋),내전 환경전(歡慶殿),경춘전(景春殿),통화전(通和殿),양화당(養和堂),연희당(延禧堂),건극당(建極堂),외원(外苑) 함춘원(含春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희궁(慶熙宮)은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正殿) 숭정전(崇政殿),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자정전(資政殿),왕의 개인 생활,침식하는 대전(大殿) 융복전(隆福殿),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회상전(會祥殿),내전 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경륜재(經綸齋),위선당(爲善堂),상휘당(祥暉堂),함춘헌(含春軒),안희합(安喜閤),지효합(至孝閤), 내전 별실 덕유당(德游堂),덕유당 부속 공간 사물헌(四勿軒),내전 하례(賀禮) 공간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왕의 어진(御眞) 봉안하는 태령전(泰寧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계상당(啓祥堂),대비전(大妃殿) 장락전(長樂殿),대비전 부속 건물 봉상루(鳳翔樓),용비루(龍飛樓),대비전 별당 어조당(魚藻堂)과 동궁전 내당(內堂) 즙희당(緝熙堂),양덕당(養德堂),동궁전 부속 건물 중서헌(重書軒),동궁전 별당 경선당(慶善堂),세자 사무 공간 경현당(景賢堂),세자 서재 문헌각(文獻閣),세자 강학하는 존현각(尊賢閣),혼천의(渾天儀) 설치한 규정각(揆政閣),휴식 공간 청한정(淸閒亭),춘화정(春和亭) 등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경운궁,경복궁,창덕궁,경희궁,창경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광해군이 건립한 인경궁(仁慶宮),고종의 잠저 운현궁,황실 가례(嘉禮)를 위한 안동별궁(安洞別宮),영조의 잠저 창의궁(彰義宮),인조의 잠저 어의궁(於義宮),정종과 세종의 연희궁(延禧宮),광해군의 잠저 이현궁(梨峴宮),정조의 생부 장조(莊祖) 사당 경모궁(景慕宮),제안대군의 수진궁(壽進宮),명종 아들 순회세자의 용동궁(龍洞宮),관아,성곽,돈의문,숭례문 역사문화경관을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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