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 향토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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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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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지 선생 묘(향토유적 제 4 호)
김여지(金汝知)(1370∼1425) 선생은 고려말(高麗末), 조선 초기 (朝鮮 初期)의 문신으로서 호는 창주(滄州), 자는 자행(子行), 밀직제학 도(密直提學 濤)의 아들이다. 창왕(昌王)1년(1389) 문과(文科)에 장원한 뒤 정언(正言)·사헌규정(司憲糾正)등을 역임했다. 조선 태종(太宗)때 장령(掌令)·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집의(執義)를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대사헌(大司憲), 공조판서(工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문란(紊亂)했던 호패법(號牌法)을 개정했다. 1418년 세종(世宗)이 즉위하자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세종7년(1425) 예조판서·좌참찬(左參贊)을 역임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묘는 부인서계이씨(西溪李氏)·초계정씨(草溪鄭氏)와 합장했는데, 둘레가 높이 135㎝ 의 3단 사대석(莎臺石)으로 다듬어진 장방형(長方形)묘라는 점에서 특색을 지닌다. 묘는 정면 2.79m, 측면 2.10m 이며 봉분 높이는 1.35m 이다. 묘 정면에는 2기의 작은묘비,상석,향로석,좌측에 새로 건립된 묘비, 그리고 문인석,동자석 등의 석물이갖추어져있다. 묘 앞의 화강암 소형 구비(小型 舊碑)는 앞면에 []라 음각되었고,뒷면에 기명(記銘)으로 보아 세종7년 (1425)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묘 좌측의 대형묘비는 옥개와 비좌를 갖추었는데, 앞면의 비문은 구비(舊碑)와 동일하다. 신비(新碑)의비신은 대리석으로 높이 145㎝, 폭 56㎝, 두께 28㎝의 규모이다. 이곳 분묘의 하단에서 중심부까지 돌린 3단호석은 원래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초기 묘제(墓制)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 준다.[찾아오시는길]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 산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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