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적 복지국가가 ‘행복할 권리’를 강조하는 이유
역동적 복지국가가 ‘행복할 권리’를 강조하는 이유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15.08.2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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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이(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학교 교수)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말은 대체로 보편타당성을 획득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헌법 제10조에도 ‘행복추구권’이 명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권리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행복의 조건’이 제도화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권(시민권)이다. 즉, 인권의 제도적 보장이 없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다. 마샬(Marshall)이 제시한 시민권(인권)은 ‘행복의 조건’을 설명하는 데 충분히 유익하다. 자유권(공민권, civil rights), 참정권(political rights), 그리고 사회권(social rights)이 바로 시민권이다. 이런 세 가지의 권리가 제도적으로 잘 보장되고 있을 때라야 행복추구권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고, 그런 사회는 온 국민의 ‘행복할 권리’가 잘 보장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의 제도적 조건

먼저, ‘자유권’은 18세기에 확립되었다. 토마스 홉스에서 시작된 근대 사회계약론 주창자들은 법 앞에 평등한 자유권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근대국가는 국민의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를 중심으로 계약과 거주이전 및 직업선택의 자유 등의 기본적 자유의 보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이것을 공민권 또는 사회적 자유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확립된 18세기의 자유권(자유주의)이 바로 ‘정치적 자유주의’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사유재산권의 보장과 계약의 자유를 중심에 두고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불러왔다. 자유권은 이렇게 해서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통합적 구조물로 발전했다.

19세기의 산업혁명은 자유권에 기반을 두고 우리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성과물이다.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근대의 자유주의 시대에는 ‘신분’의 제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신분 대신 각자의 ‘능력’이 중요했다. 유능한 사람은 자유주의 시대의 자유방임 시장에서 펼쳐지는 산업혁명의 거대한 전환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신분이 자유권 이전의 시대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경제사회적 방식을 정의하는 기준이었다면, 능력은 자유권이 확립된 이후에 등장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정의하는 새로운 기준이다. 그렇다고 능력만 중요한 게 아니다. 부모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는다면 시장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래서 자유권(자유주의)은 필연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한다.

결국, 인류의 행복 증진을 위해서는 인권의 첫 번째 요소인 자유권의 보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인권의 두 번째 요소가 등장해서 자유권의 시대가 초래한 불평등을 교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1918년까지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보통선거권이란 이름으로 제도화된 ‘정치권(참정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등과 격차는 개선되지 않았고, 이런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결국 1929년 대공황이 발생했다. 이는 자유권(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지나치게 불평등한 세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큰 교훈을 남겼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뉴딜을 통해 국가의 경제개입을 정당화했고 베버리지의 사회정책을 제도화했다. 이것이 인권의 세 번째 요소인 ‘사회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국가들은 기존의 자유권과 참정권에 더해 사회권을 제도화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독재 또는 권위주의 정부들로 인해 자유권을 포함한 인권의 퇴행과 발달 지체를 겪었으나 1987년 민주항쟁 이후 1990년대를 거치면서 자유권(공민권)과 정치권이 보장된 ‘정치적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문제는 사회권이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산업화와 민주화에 집중함으로써 4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큰 성과를 냈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은 행복하지 않다. 거의 모든 행복지수 연구에서 우리나라는 언제나 OECD 최하위를 맴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장만능주의 방식으로 경제사회 질서가 재편되면서부터 불평등과 격차는 더 심각해졌다. 그래서 복지확충 또는 사회권에 대한 요구가 급증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등장과 ‘보편적 복지’ 정책의 확산

우리나라에서 ‘보편적 복지’를 사회운동의 과제로 제기하며 정치사회적 공론화를 주도했던 것은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였다. (사)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1년여의 준비를 거쳐 2007년 7월 <복지국가 혁명>이라는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겸한 출범식을 거행했다. 이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계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보편적 복지와 “역동적 복지국가”의 공론화를 위해 분주하게 노력했고, 마침내 기회의 창이 열렸다. 2010년 봄 경기도의회가 무상급식 예산을 삭감하면서 여야 간의 정치적 공방이 벌어졌다. 당시 여권은 보편적 무상급식을 사회주의 방식이라며 비난했고, 야권은 선별적 무상급식은 빈곤에 대한 수치심을 통해 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며 보편적 무상급식의 타당성을 옹호했다.

이 논쟁은 정치적 사활이 걸린 전국적 쟁점으로 발전했다. 이때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무상급식 논쟁을 계기로 ‘보편적 복지’를 공론화하는 데 적극 나섰고, 결국 2010년 6.2 지방선거 직전부터 무상급식을 주제로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논쟁이 벌어졌다. 지방선거 이후에도 무상급식 이슈를 포함한 보편적 복지는 우리사회의 중요한 정치사회적 쟁점이었다. 특히, 2010년 10.3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이 당헌에 보편적 복지를 당의 목표로 추가하면서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쟁투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여권은 보편적 복지의 수용을 주장하는 개혁파 비주류와 선별적 복지를 완고하게 주장하는 청와대와 주류로 나뉘어졌다. 당시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논쟁은 첨예한 정치적 갈등 요소였다.

그리고 이 논쟁은 선별적 복지 옹호자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도했던 2011년 8월 24일의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계기로 꼭짓점에 도달했다. 이후 오세훈 시장의 퇴진과 박원순 시장의 당선, 그리고 야권의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보편적 복지는 정치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다. 그래서 지난 대선 때는 새누리당도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복지를 수용했고, ‘한국형 복지국가’ 공약을 내세웠다. 지난 5년 동안 치열하게 때로는 적대적 형태로 진행되었던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논쟁은 우리 국민이 인권의 세 번째 요소인 사회권의 제도화를 통한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접하도록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보편적 복지’ 수준은 여전히 저열하다.

‘행복할 권리’ 보장과 사람에 대한 투자로서의 보편적 복지

롤스가 제시한 정의의 제1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다.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자유(equal liberties)를 누릴 권리를 가지므로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통선거권, 직업 선택의 자유, 재산을 소지할 자유 등의 기본적 자유를 온전하게 보장받아야 한다. 자유권은 만민을 모든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으므로 인권의 구성요소로서 인류 행복의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자유권(경제적 자유)은 불가피하게 격차와 불평등을 낳는다. 이런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의 제1원칙인 자유권의 보장이 초래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제2-b원칙)과 ‘차등의 원칙’(제2-a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제2-b원칙)부터 살펴보자. 재벌가의 자녀들과 노동자 집안의 자녀들은 애초부터 엄청난 불평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는 조선시대의 불평등이 신분에 의해 대물림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 상속을 포함하여 시장의 자유(자유권)에 의해 초래된 불평등과 격차를 국가가 개입해서 교정하는 것이 옳다. 국가가 우리사회의 모든 직책과 직위들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정하게 개방되도록 하고, 이것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실질적인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도록 제도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한 경제사회적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도적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출산, 육아(보육), 교육, 직업훈련, 평생교육, 의료, 요양 등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 보편적 방식으로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사회구성원 모두의 일생에 걸친 사회서비스 이용에서 부모의 경제적 능력 차이에 따른 차별을 해소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서비스는 능력 개발을 위한 사람에 대한 투자이고, 원하는 직책과 직위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는 공정해야 한다. 다음으로 4대 사회보험에서 실질적 보편주의(보편적 가입과 적절한 보장수준)를 달성하고, 아동수당 등의 사회수당을 보편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일생에 걸친 소득보장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사회구성원 누구라도 일생동안 소득이 단절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제2-b원칙)은 보편적 복지(사회서비스와 소득보장)를 요구한다.

다음으로 ‘차등의 원칙’(제2-a원칙)이다. 이것은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제2-b원칙)이 적용된 후에 작동하는 원칙이다. 보편적 복지의 양대 축인 사회서비스와 소득보장이 일생에 걸쳐 제도적으로 잘 작동하더라도 격차와 빈곤의 문제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보편적 복지의 제도화를 통해 사회경제적 차이로 인한 불평등과 격차를 최소화함으로써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제2-b원칙)이 잘 지켜진다고 해도 지능이나 체력(외모)과 같은 자연적 능력의 차이로 인한 불평등과 격차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사회경제적 약자와 빈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때 적용되는 것이 바로 ‘차등의 원칙’(제2-a원칙)이다. 선별적 복지가 필요한 이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그것이다. 

보편적 복지에 대한 편견 버리고 “역동적 복지국가”로 가야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논쟁을 통한 보편적 복지의 확충은 복지국가로의 전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 보편적 복지는 시민권의 보장을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생애주기에 걸쳐 필요한 복지(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고, 선별적 복지는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근로능력이 없는 극빈자들을 자산조사를 통해 엄격하게 선별하여 기초생계를 지원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인권(특히 사회권)의 증진을 위해서는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 모두가 중요하다. 그런데 왜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논쟁이 벌어졌는지, 왜 지금까지도 이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복지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금방 드러난다. 지금까지 역대 정부의 복지철학은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였다. 권위주의 산업화 시기에도 그랬고, 민주화 시기에도 그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도 양극화와 격차 문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큰 시장, 작은 정부’라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라 역대 정부가 추진해온 시장만능주의 경제정책과 짝을 이루면서 주로 선별적 복지에 머물렀다. 이 말은 우리나라가 선별적 복지를 잘 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고령화와 양극화로 인해 선별적 복지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데 비하면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므로 극빈자들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선별적 복지도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론을 달지 않는다.

결국 선별적 복지에만 머물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 복지의 제도화에 나섬으로써 복지국가로 나아갈 것인지가 ‘보편적 복지-선별적 복지’ 논쟁의 핵심이다. 나는 공정한 기회균등에 대한 우리사회의 높은 요구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보편적 복지의 제도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극화 경제와 선별적 복지의 기존 짝으로는 사회권의 부실로 인해 인권의 증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도 매우 어려워진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반면교사인데, 우리나라의 경제와 복지는 과거의 일본 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경제는 양극화되고, 보편적 복지의 양대 축인 사회보험과 사회서비스는 실질적 보편주의에 크게 못 미친다. 질병보험은 아예 없다. 고용보험과 국민연금은 사각지대가 넓고 소득대체율도 턱없이 낮다. 교육과 의료 등 사회서비스도 보장성과 공공성이 매우 저열하다.

넓은 사각지대와 낮은 보장성 수준에서 드러난 것처럼,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권의 핵심인 보편적 복지가 제대로 제도화되지 못한 탓에 일생에 걸친 소득에서부터 보육․교육․의료 등의 사회서비스, 일자리, 직업훈련과 평생교육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복지를 각자 알아서 시장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이런 시장만능주의 경제사회체제에서 탈락한 소수의 극빈자들에 대해서만 국가가 선별적으로 기초생계를 보호했다. 나는 이런 ‘경제-복지 체제’를 <신자유주의 경제-선별적 복지 체제>라고 규정한다. 이제 이것을 <공정․혁신적 경제-보편․적극적 복지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이는 “역동적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자 우리시대의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 이 칼럼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에 게재한 필자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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