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의 대승적 결단과 김정은
고르바초프의 대승적 결단과 김정은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15.03.3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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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지중해 몰타에서 미소 정상은 회담을 가졌고 이 회담에서 세계를 휩쓸었던 냉전의 종식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뒤이어 1990년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이듬해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었다. 러시아, 발트삼국 등 소련 백성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 수 있었고, 전 지구를 멸망의 길로 이끌던 군비경쟁 또한 잦아드는 등 전 세계는 데탕트(détente)를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았던 냉전이 어떻게 종식될 수 있었을까? 이에는 공산주의의 내재적 비효율성, ‘프라하의 봄’을 위시한 자유에의 움직임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소련의 대내외적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개혁과 개방을 결단한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존재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련은 냉전시대 미국과 함께 양강의 구도를 형성했던 국가였다. 사회주의권의 영수로서 지구 육지면적의 1/6인 2,240만 3,000㎢의 영토와 1989년 당시 미국 5천만명 더 많은 2억 8,574만 3,000명을 관할하던 나라의 일인자가 바로 고르바초프였다. 5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서기장이 된 그는 대외적으로 사회주의국가의 결속을 다지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젊은 서기장은 경쟁력을 상실해가는 공산주의의 본원적 한계와 부정부패로 곪아가는 소련의 실체를 외면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취임 시부터 개방(glasnost)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듬해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대처 과정에서 나타난 소련 사회의 폐쇄성과 무능함을 절감한 이후 개방정책은 본격화 했다. 정보의 공개, 표현의 자유 인정, 사회주의의 압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등 소련 사회에 만연했던 부조리와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했다. 이와 동시에 고르바초프는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perestroika) 시책을 폈다. 민주화 정책을 실시하고 시장 경제 도입을 시도했으며 핵무기 감축조약을 체결해 미·소간 긴장 완화를 꾀하였다.

사회주의는 본래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통해 자유·평등·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는 민중을 위한, 민중이 진정한 주인인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다. 하지만 당시의 소련 사회는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수의 공산당원의 권력과 영화를 위해 사회는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민중은 오직 억압과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렇게 변질된 사회주의는 비단 소련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사회주의권 전역에서 나타난 병폐이자 모순으로서, 개혁과 개방은 피할 수 없는 수순임을 시대의 조류는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모순과 병폐만 남은 사회주의의 실상을 애써 부인하지 않았고, 개혁과 개방의 대승적 결단으로서 시대의 요구에 응한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냉전이 종식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다소 냉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북위 38도의 위에 위치한 우리의 절반에서는 고르바초프가 개혁과 개방을 통해 척결했던 변질된 사회주의적 병폐와 부조리, 모순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일당독재를 넘어선 일인독재 체제하에서 2,300만 민중은 오직 하나의 가문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비록 민주는 아닐지라도 민본만큼은 기본이념으로 추구했던 것이 과거의 전제 왕조였음을 감안하면, 전 국민이 한 일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모순된 형세는 고금을 통틀어서도 유례(類例)를 찾기 힘들다. 이에 북한의 세 번째 통치자는 고르바초프의 선례를 좇아 25년이나 묵은 시대의 요구에 뒤늦게나마 부응하여 이 땅에도 데탕트(détente)가 깃들일 수 있도록 대승적 결단을 내려주길 바랄 뿐이다.

 

의정부보훈지청 선양담당 오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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