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며
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며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15.01.12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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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보훈지청 보훈과장 정두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6년 동안 잃었던 빛[光]을 되[復]찾았다. 근현대사를 통틀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경사라 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광복과 아울러 민족이 남과 북으로 나뉘는 남북 분단을 맞이했으니 이는 근현대사를 통틀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애사 중 하나라고 할 만한 일이다. 이처럼 그 역사적 의의에 있어 상반되는 의미를 지는 광복과 분단이 같은 시기에 발생했기에, 우리 민족에게 1945년은 기쁨의 해인 동시에 아픔의 해인 모순적 감정이 상존(相存)하는 해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모순을 맞이한 지 70주년이 되는 을미년의 벽두에 이 모순이 왜 발생한 것인지,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는지, 또 지금이라도 분단의 상황을 극복하여 1945년을 우리 민족의 온전한 경사로만 후대에 기억되도록 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지 천천히 살펴보는 일은 상당한 의의를 지니는 일이라 할 것이다.

1945년의 광복과 분단의 전모를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대외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최초로 언급되었고 러시아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었는데 이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강(兩强)이 추후 한반도에서 벌이게 될 각축전의 단초가 되었다. 이후 포츠담 회담의 대일 선전포고를 거쳐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지만 우리 민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라는 ‘파이’를 놓고 벌이는 다툼이었다. 8월 17일 맥아더는 38선 획정(劃定)의 내용을 담은 「일반명령 제1 호」를 발표하였고 소련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한반도는 그 주인의 의향과는 무관하게 남과 북으로 나뉘는 비극을 맞이했다.

한편 대내적으로도 우리 민족은 1920년을 전후하여 유입된 사회주의에 의해 극심한 좌우갈등을 겪고 있었다. 독립이라는 단일 목표가 존재했던 광복 이전에는 신간회 창립 등 좌우합작을 통한 이념갈등 해소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광복으로 그 목표가 사라지자 이념은 민족을 넘어선 제일의 가치로 급부상하여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기에 앞서 왼쪽인지 오른쪽인지가 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우리 민족도 광복을 준비하고 분단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광복 전후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자주적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으나 좌우대립과 미군정의 건준 불인정으로 와해되어 그 결실을 맺을 수 없었다. 국외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여 자력에 의한 우리 민족의 독립을 꾀하였으나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으로 이 노력 또한 무산되었다.

이에 김구는『백범일지』에서 “(일본의 항복은)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일이며, 우리가 이번 전쟁에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가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고 하여 광복을 맞이한 민족에게 드리울 암운을 예견한 바 있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조직, 남북협상의 진행 등 미군정기에도 분단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졌으나 미소(美蘇)의 파이 다툼과 극단적 좌우갈등으로 통일정부의 수립은 점점 요원해 졌다. 결국 서울과 평양에 각각의 정부가 들어선 1948년의 비극은 그 3년 전부터 이미 예견되었던 기정사실이었다.

이러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민족은 1972년 7․4공동성명 이래 6․15공동선언, 10․4공동선언 등 화해를 움직임을 보인 한편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등을 구상하여 통일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하지만 이 노력들이 통일을 위한 진솔한 발걸음이기보다는 서로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구호 내시는 수사(修辭)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을미년 벽두에 원론적 통일의 길을 제언하자면 첫째는 7․4공동성명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원칙에 입각한 공동번영 노력을 전개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국제사회의 적극적 지지와 협조를 확보하는 것인데 70년 전의 분단이 사실상 외력(外力)에 의한 비극이었음을 상기하면 이 항목의 중요성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북 간 꾸준한 교류와 협력 증진을 통해 상호 번영과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화통일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일찍이 백범 선생은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고 한 바 있다. 얼핏 보면 1945년 광복으로 이 소원은 이루어진 듯하다. 하지만 ‘자주독립’을 전치 수식하는 ‘완전한’이라는 형용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완전하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남과 북이 서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광복을 결코 완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백범 선생의 ‘나의 소원’은 광복과 분단의 공존이라는 모순적 상황이 말해주듯 미완의 소원이라 하겠다.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는 백범 선생의 의지를 이어받아 선생의 소원을 이루고 ‘광복 및 분단 70주년’과 같은 연두 수사에서 ‘분단’을 삭제하여 1945년의 광복을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일은 당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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