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양평백운신문
  • 승인 2015.01.0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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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정 희(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군산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개인의 불행과 아픔을 완충시키는 최후의 보루는 국가다. 그러므로 국가는 국민이 최소한 ‘최저임금’은 받을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규제하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정규직 일자리를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 아프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은퇴를 하거나 하는 이유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도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전쟁과 재난,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야 한다. 이것들이 국가의 ‘존재 이유’여야 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배치되는 박근혜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

박근혜 정부의 집권 2년은 이명박 정부에 이어 국가의 존재 이유를 사실상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시장에서 평균임금의 38% 수준에 불과한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16%에 이를 만큼 그 비중이 높다.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이렇게 낮게 책정된 법정 최저임금마저 지켜지지 않는 일자리는 전체 일자리의 12.6%에 이른다.

특히 박근혜 정부 2년 동안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근로자가 62만 명이나 증가했다. 이는 법정 최저임금 제도에 대해 국가가 관리감독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는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최저임금 수준은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국가군에 속한다.

OECD 노동통계에 의하면 중위임금 대비 최저임금의 수준이 가장 낮은 국가군에 속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최저임금 인상에 매우 인색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저임금 근로자 비중은 전체 근로자의 25%를 차지할 만큼 매우 높은데, 이 역시 OECD 국가들 중 단연 선두이다. 4명 중 1명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은 열심히 일을 해도 먹고 살기가 힘들다.

저임금만으로도 큰 문제인데, 불안정한 일자리가 너무 많다. 2014년 전체 임금 근로자 중 비정규 근로자의 비중은 정부 통계로 32.4%, 노동계의 통계로 44.7%이다. 우리나라처럼 비정규직 일자리가 전체 일자리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국가는 선진국 중에서는 단연코 없다. 문제는 비정규직의 규모가 얼마나 큰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시간제 일자리의 자화상

대다수 선진국들의 비정규직 일자리는 주로 시간제(파트타임) 일자리이고, 선진국들의 시간제 일자리는 직접 고용 방식이다. 그러면서 시간당 임금과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사회보험 등이 보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들 선진 복지국가들에서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반드시 질 낮은 일자리와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비정규직 일자리는 사회보험 등이 보장되는 유럽 복지국가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시간제 일자리가 아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사회보험 가입률은 사회보험 별로 40% 내외에 머물고 있다. 비정규직 근로자의 60%는 사회보험에서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정규직 일자리도 기간제, 파견제, 도급(혹은 용역)근로, 특수형태근로, 시간제, 일용근로, 가내근로 등 너무도 다양한 간접고용 형태와 불안정 고용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파견업체나 용역업체를 통해서 직장을 구한 근로자는 자신의 직장에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어도 고용주와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외국에서의 비정규직 일자리는 주로 사업주가 시간제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지만,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일자리는 사업주가 직접 고용하는 시간제 일자리의 비중은 매우 낮고, 다른 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하는 방식의 파견제, 용역, 일용 등의 고용형태가 너무 많다. 또한 외국에서 ‘가짜 자영업자’라고 부르는 특수형태근로로 계약하여 아무런 근로보장을 하지 않는 일자리도 너무 많다.

주변을 둘러보면 안정적인 일자리가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형 마트를 가면 불법 파견근로와 용역근로 형태의 근로자들이 판매를 하고 계산을 한다. 대부분의 작은 소매점들에서는 미등록 근로자나 시간제 아르바이트생들이 판매를 한다. 식당에 가면 통계상으로는 정규직이지만 퇴직금이나 사회보험, 근로기준법 등이 보장되지 않는 정규 임시직 근로자이거나 시간제 근로자들이 대부분이다.

제조업 공장들에서는 일부 정규직 근로자와 파견 혹은 용역이라 불리는 사내하청 근로자들이 상품을 생산한다. 운동을 배우러 가게 되면 특수형태근로 종사자라 불리는 스키장 강사, 골프장 캐디, 수영 강사, 레프팅 강사 등을 마주치게 된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정수기 코디, 학습지 교사, 택배 기사, 미용실 헤어디자이너, 이들 역시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특수형태근로 종사자들이다.

간접고용 방식의 고용형태로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정규직 근로자에 비해 임금 수준도 절반이고, 사회보험에서도 배제되어 있으면서,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근로자라면 누릴 권리가 있는 근로시간ㆍ휴일ㆍ시간외 근무수당 등도 요구하지 못한다. 고용주는 직접 근로자를 고용하지 않고 용역업체나 파견업체를 통해서 근로자를 제공받았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근로 지시를 하는 근로자들에게 고용주로서의 의무를 면제받는다.

노동시장이야말로 복지국가의 시발점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는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고용주에게만 좋은 나라’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우리나라에서 기업하기 좋다는 것은 근로자가 근로를 하기에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달 24일 박근혜 정부는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정규직 해고를 용이하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보다 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기업을 하는 사람보다 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대다수인 이 나라의 국민은 계속해서 기업하기 좋게끔 희생하고 또 희생해야 한다.

모든 복지국가의 시발점은 노동시장이다. 안정적인 고용과 적절한 수준의 임금을 바탕으로,  근로자가 부담하는 사회보험료와 세금이 복지국가를 운영하는 밑거름이다. 노동시장이 안정적이어야 사회보장에 필요한 재원이 제대로 마련되고, 재정 지출이 늘어나지 않게 된다.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환경에서라면 근로자들은 사회보험료와 세금을 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기여 회피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정작 해고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회적 보호를 받기 어렵게 된다.

이런 악순환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만 혈안이 된 채, 국민의 생존이나 안전에는 무관심한 ‘국가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가가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은 국민들이 안전하게 노동하고, 행복을 영위하는 들판이다. 추운 겨울이 와도 그 들판에 언젠가 봄이 오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묵묵히 시련을 견뎌 나간다. 그러나 그들에게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들판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지금의 시련을 견뎌나갈 수 있을까? 어쩌면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지 않을까.

<복지국가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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