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恭愍王)
공민왕(恭愍王)
  • 홍용선
  • 승인 2001.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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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1374, 재위기간 : 1351∼1374)
공민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으로서 초명은 기(棋)요, 후에 전으로 바꾸었으며 호를 이재(怡齋), 또는 익당(益堂)이라고 했다. 그는 충숙왕 17년(1330)에 탄생해서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봉해졌다가 충혜왕 2년(1341) 5월에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명에 따라 연경(燕京=北京)에 불려가 그 곳에서 10년간을 머물다 귀국하였다. 당시 원 나라는 고려왕실을 통한 간접통치 방식으로 고려를 지배하였다. 고려국의 존립은 인정해주되 문제가 생기면 사신을 보내 문책하거나 혹은 왕을 갈아치우곤 하여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은 모두 한 차례씩 폐위된 적이 있었다. 때문에 당시의 고려조정은 원나라의 눈치만 살피며 보신에만 급급한 무리들이 들끓었다. 원의 간접통치가 가장 잘 드러난 정책이 바로 원나라 공주와 고려왕의 결혼정책이어서 충렬왕이 원나라 세조(世祖)의 딸을 왕비로 맞은 이래 역대 고려왕은 원 왕실의 공주를 왕비로 맞으며 왕자들을 볼모로 원나라에 보내야 했고 왕의 시호에는 충(忠)자를 붙여 원에 충성한다는 뜻을 나타내야만 했다. 공민왕도 12세에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20세때 원나라 공주인 보탑실리(보塔室里)를 왕비로 맞았으니 그가 곧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공민왕은 이후 충정왕의 뒤를 이어 22세의 나이로 연경에서 왕위를 계승(1351)하고 그 해 12월 노국공주와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그가 개경(開京, 개성)으로 돌아올 때 중국에서 수집한 많은 책과 기물, 각종 서화들을 가지고 왔는데 이는 이후 조선조시대 중반까지도 왕실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공민왕이 즉위할 때는 원의 세력이 크게 쇠퇴해서 후일 명(明)나라 태조가 된 주원장(朱元璋)이 남경(南京)을 함락(1356)하는 등 원의 지배력이 급격히 약해지던 때였다. 공민왕은 이때를 맞아 반원(反元)자주화 개혁정치를 펴서 친원세력의 우두머리인 기(奇)씨 일족을 제거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원의 지배하에 있던 철령(鐵嶺)이북의 땅을 되찾는가 하면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면서 관직의 명칭과 복식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고려는 이때 왜구(倭寇)와 홍건적(紅巾賊)의 난동이 심해서 한 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1361년에는 홍건적들이 개경에까지 침입해 궁궐을 불사르는 바람에 공민왕은 상주(尙州)로 피난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에 걸려 있는 무량수전(無量壽殿)글씨는 공민왕이 이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安東)에서 일시 머무를 때 친필로 쓴 것이었다. 난리를 평정하고 개경에 돌아온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기용해 사회개혁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신돈은 중으로써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의 총책임을 맡아 권문세가들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들의 신분도 되돌려 주는 등 한때 민중들에게 ‘성인(聖人)’이란 칭송을 들었다. 이때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이 원나라에서 살 때 원왕에 의해서 맺어진 왕비였지만 그녀에 대한 공민왕의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왕비가 죽자 그녀를 정릉(正陵)에 안장하고 그녀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 봉안케 하였는데 이 노국공주의 초상화는 공민왕이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과 함께 조선조 말까지도 장단(長湍)의 화장사(華藏寺)에 전해지다가 이후 불행히도 화재를 당해 소실되었다. 공민왕은 그토록 사랑하던 노국공주를 잃은 후 실의와 비탄에 빠져 정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이후로는 죽은 왕비의 생각과 서화 등으로만 낙을 삼아 소일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에 신돈의 권세는 더욱 막강해지고 그가 전권을 휘두르게 되자 정국은 혼미해졌다. 이틈을 타서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의 권문세력은 신돈을 역적으로 몰아 처단하였고(1371) 개혁은 완전중단 되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살리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1374년 환관 최만생(崔萬生)과 홍륜(洪倫)등에게 궁전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공민왕 23년, 9월 22일, 심야 3경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때에 공민왕의 나이는 45세, 그의 현릉(玄陵)은 현재 북한 땅 장단에 노국공주의 정릉과 함께 쌍분(雙墳)으로 남아있다. 공민왕은 원래 성품이 엄정했고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인후(仁厚)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시·문·서·화 등 백가지 재주를 두루 갖추고 모든 분야에 다재다능 했는데 특히 서화에서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어 우리 나라의 역대 제왕(帝王)화가 중에서나 고려조의 화가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다. 그는 중국의 북송대(北宋代) 풍류황제 휘종(徽宗)과 더불어 세계미술사상으로도 ‘예림(藝林)의 갑을(甲乙)의 자리를 다툴만한’(고유섭) 고려조의 마지막 풍류제왕이었다. 휘종의 말년이 비참했던 것처럼 공민왕도 참혹한 최후를 맞았으니 역사상 대표적인 풍류제왕들의 말로는 모두 순탄치 못한 비운의 것이었다. 공민왕이 그린 그림은 신하들의 초상화, 인물화, 산수화, 궁궐화, 동물화, 화조화, 어해화(물고기와 게그림)등 적지 않은 숫자에 달하고 그 중에도 화장사에 있었던 <조경자사도(照鏡自寫圖)>는 그가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으로서 우리 나라 회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자화상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공민왕의 확실한 그림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수렵도>뿐인데 이 그림은 3장의 단편(斷片)으로 분리되어서 각각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1폭과 <음산(陰山)대렵도> 2폭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이외에도 현재 간송(澗松)미술관에는 <이양도(二羊圖)> (15.7×22㎝)가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칭(傳稱)되어 소장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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