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상원사
  • 박경희
  • 승인 2001.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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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은빛 억새가 그립다. 나를 향해 손짓하는 억새들과 반갑게 악수하고 싶다.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는 은억새 사이를 백치처럼 걷고 싶은 계절. 난 짧은 가을 여행을 떠난다.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에 자리잡은 상원사. 상원사를 오르며 은근히 억새군단의 환호를 기대한다. 그러나 상원사엔 억새가 없다. 드문드문이라도 있을 법한데 얼굴조차 발견할 수 없다. 대신 하늘을 찌를 듯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나를 맞아 준다. 곱게 나이 든 여인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 동행한 사진작가가 셔터를 눌러대느라 정신이 없다. 쨍! 전율이 느껴질 만큼 맑고 깨끗한 물소리가 청아하다. 찰찰찰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 가 나뭇잎을 오므려 물을 떠 마신다. 갑자기 어린 시절 큰 봉으로 천렵을 떠났던 일이 생각난다. 그 때처럼 가재가 있을까 싶어 돌을 살며시 젖혀 본다. 가재들 역시 나처럼 가을 여행을 떠났나 보다. 둥근 바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일상을 벗어난 자유로움이 내 안에서 넘실댄다. 하늘이 내려앉을 것처럼 숲이 깊다. 산새가 웅장하다. 용문산 줄기마다 이토록 독특한 자태를 풍기는 계곡이 있다는 것이 신비스럽기만 하다. 상원사 뒷편은 어머니의 넓은 가슴처럼 푸근하다. 백운봉과 용문산을 잇는 완만한 능선이 아늑하다.그러나 오래된 절 특유의 쓸쓸함은 어쩔 수 없다.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절이기 때문인지 개미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다. 돌계단을 오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인도풍의 굴뚝이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생경하다. 바로 옆에 있는 너와 지붕 또한 이색적이다. 굵은 나무껍질로 만든 지붕 위에서는 이름 모를 버섯들이 나그네를 향해 미소짓는다.대웅전을 향해 가기 전, 왼편에 아무렇게나 지은 인조 건물 한 채가 눈길을 끈다. 방갈로 같기도 하고, 짓다 만 사랑채 같기도 한 작은 건물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문화재 보존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지어 놓은 조립식 건물. 할 수만 있다면 뒤편으로 덥석 들어서 옮기고 싶은 심정이다.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 모퉁이에는 여러 석조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유심히 살펴보니 팔각연화대석과 돌사자상이 있다.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던 것 같은데, 뚜껑만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상원사는 1250년 전 통일신라 성덕왕 때 세워진 절이며 조선조 효령대군의 원찰이었다고 하니 역사가 꽤 깊은 절임에 틀림없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절에 불과한 것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이 엿보인다. 상원사에는 현존하는 중요 문화재가 없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일제 때 훔쳐 간 범종이 이 절에 있었다. 그것을 다시 찾아서 지금은 조계사에 안치하였다 한다. 대웅전 왼편에 서 있는 단풍나무 한 그루. 요염하다. 경이롭다. 신비스런 오색 단풍을 만나니 가을여행을 나온 것이 실감이 난다. 단풍나무 한 그루가 상원사에 드리운 쓸쓸함을 그나마 녹여 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상원사 입구에 자리잡은 '예스터데이'라는 음식점의 단아한 풍경과 입맛을 돋우는 버섯찌개. 그리고 그림을 사랑한다는 주인의 그윽한 미소가 마음을 잡아맨다. 상원사를 찾는 이들이라면 '예스터데이'에 들러 군고구마도 구워 먹고, 맑은 물가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송사리 떼도 만나 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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