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간 등대지기, 바다 등 지고 뭍으로>
<33년간 등대지기, 바다 등 지고 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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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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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항해를 마치고 어둠 속에서 항구로 돌아 오는 한 척의 배.뱃머리로 물길을 두 갈래로 나누는 것도 힘에 겨운 듯 점점 작은 포말을 자아내 며 귀항하는 배를 가장 먼저 반겨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먼발치에 보이는 등대의 아련한 빛 한줄기다.그 등대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불을 밝히던 27세 청년은 어느새 해풍에 주 름이 깊게 패인 60세 노인이 됐다.인천항 팔미도 등대장 허근(許根.60)씨.그는 오는 30일이면 정년퇴직과 동시에 33년간의 등대지기 생활을 마감하고 뭍 으로 돌아간다.71년 9월 교통부 해운국(해양수산부 전신)에 근무했던 사돈의 소개로 등대원 시 험을 보게 된 허씨는 합격 후 인천시 옹진군 부도에서 등대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등대지기 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진 않았다.등대원 초창기 시절에는 등대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 경유 두 통을 지게에 짊어 지고 맨 몸으로 오르기에도 힘든 야산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려야 했다.지금이야 태양열 발전기로 등대와 숙소의 난방및 전기를 해결하지만 그 당시에 는 땔감도 직접 구해야 했고 여의치 않을 땐 냉방에서 덜덜 떨며 겨울밤을 지새워야 했다.또 일출 후에 등대불을 켜 둔 채로 놔두면 등명기 프리즘이 태양열에 탈 수 있 기 때문에 항상 일출 전 30분 전에 일어나서 등대불을 꺼야 했다.삼시 세끼 손수 밥을 지어야 했고 하루 5차례씩 풍향, 풍속, 파고 등을 체크해 기상관측 결과를 기상대에 보고해야 했다.¨사실 젊었을 때는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죠. 그러나 그 때마다 나를 버틸 수 있게 힘을 준 것은 가족이었습니다.¨ 허씨는 등대원이 된 이듬해인 72년 2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부도 등대 기숙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세 자녀 중 둘째까지도 등대에서 갖게 됐지만 78년 팔미도 등대에서 일하면서부 터는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을 인천 육지로 보내고 혼자만 섬에 남아 등대원 일을 계속했다.나머지 등대원들과 교대로 한 달에 한 번 일주일 가량 휴무일을 얻어 가족들과 애틋한 만남을 이어갔지만 가족을 뒤로 하고 섬으로 돌아가야 할 땐 일주일이 늘 짧 기만 했다.¨등대원으로 일을 하다 보니 섬에 묶여 있어 장인, 장모 회갑잔치에 참석도 못 했습니다. 대부분의 가족친지 경조사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너무 미안할 따 름이지요.¨ 허씨는 33년의 등대지기 생활 중 모두 3차례에 걸쳐 13년 동안을 팔미도 등대와 함께 했다.군사작전 구역 내 위치한 팔미도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허씨의 외 로움은 더했지만 인천항을 오가는 배들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여느 다른 등대에서 일할 때보다도 더 큰 사명감을 갖고 일을 했다.팔미도 등대가 국내 최초의 등대로 격변의 한세기동안 수많은 배들의 친근한 길 잡이 역할을 하며 100년간의 소임을 마치고 지난해 신축등대에 제 임무를 넘긴 것처 럼 허씨도 이제는 33년의 등대지기 생활을 마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 주게 된다.¨청춘을 등대에 바쳤지만 후회는 조금도 없습니다. 후회없는 삶을 살았으니 성 공한 거 아닌가요? 허허허...¨ 33년간 어둠을 밝혀 온 등대지기의 고단함이 넉넉한 웃음 속에서 녹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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