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대한국의 대외관계
조선과 대한국의 대외관계
  • 김민수
  • 승인 2009.02.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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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대한국의 대외관계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중국과의 대외관계는 임진왜란에 명의 원군이 큰 도움이 되었고 명과 청의 전쟁에 5만 명의 원군을 파병하였다. 하정사(賀正使)·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동지사(冬至使)의 정기 사절이 있고,무역도 이루어져 말·인삼·화문석·모피·모시를 수출하고 약재·서적·견직물·도자기를 수입하였다.



여진족에게는 회유와 강경책을 병행하였는데 복속한 여진족의 추장에게는 관작을 주고 무역을 하기도 하였으며 세종에서 성종까지 4군 6진을 확보하고 수차례 대규모로 정벌하였다. 누르하치가 건국한 후금에 대한 배금정책의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조선은 청에 항복하고 말았으나 효종은 북벌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과의 사대관계를 계승하여 청과의 관계에서도 사대관계가 유지되었으며 무역도 증가했는데,사신에게는 사무역이 허용되었으며 17세기 이후 사신을 통해 서양 문물와 천주교가 수입되었다.국경에는 시장이 개설되었고 조선 후기에 국내 상업이 발달하자 밀무역인 후시(後市)도 성행하게 되었다.



철종 말에서 고종 초 사이에 이주한 조선인들이 땅이 기름지고 산림이 무성하며 각종 자원이 풍부한 간도를 개척하여 농경지를 만들었다.간도에 대한 조선과 청 양국간의 최초의 교섭은 1712년(숙종 38)에 있었으며, 이때 양국의 대표들은 백두산에 올라 현지조사를 통해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정계비를 건립하였다.



1897년 이후 2차례의 상세한 현지답사를 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토록 하였으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909년 9월 7일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일본과의 대외관계는 1419년 대마도를 정벌하고 회유책으로 1443년 계해약조를 맺어 3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였고 미곡·대장경·서적·면포 등을 수출하고 동(銅)·석(錫)·후추·약재를 수입하였다. 1510년 삼포왜란으로 외교가 단절되었다가 1512년에 재개되었으나 세견선(歲遣船)과 교역 물자를 반으로 제한하였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했는데,7년 간의 전쟁 끝에 조선은 일본을 물리쳤으나 큰 피해를 남겼고,조선 후기의 사회·경제·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1609년 일본과 외교를 재개하여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1869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 외무성 관리 3명이 돌아와 일본 정부에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하였다. 이 내탐서에는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나와 있다.



1877년 일본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이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였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이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를 포함시키고 이를 대한제국 관보를 통해 공포하였다.



러시아는 베베르(Woeber)를 내세워 친러파(親露波)를 형성하여 정계를 좌우하고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시켜 친러파 내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진출을 원치 않는 일본과의 대립으로 러일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일본이 승리하여 러시아의 남방진출은 막히게 되고 대한국은 병탄되고 말았다.







궁궐4문 앞 궐외각사,북원은 경복궁 권역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1395년 태조가 조성한 법궁 경복궁(景福宮)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68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는데 궁궐 4문 중앙에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 근정전(勤政殿),왕의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 사정전(思政殿),대전 강녕전(康寧殿),중궁전 교태전(交泰殿),동궁전 자선당(資善堂),세자가 학문 강학하는 비현각(丕顯閣),세자의 사무 공간인 계조당(繼照堂),대비전 자경전(慈慶殿),집현전(集賢殿) 수정전(修政殿)이 있다.



북편에는 고종이 친정을 한 건청궁(乾靑宮),사신 접대,서재로 쓰인 집옥재(集玉齋),내전 흥복전(興福殿),만경전(萬慶殿),집경당(集慶堂),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선원전(璿源殿), 왕 장례시 관을 모셔두는 빈전 태원전(泰元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혼전 문경전(文慶殿),국상시 사용하는 회안전(會安殿),육상궁·연호궁·덕안궁·경우궁·선희궁·대빈궁·저경궁 등 후궁 신위를 봉안한 칠궁(七宮)이 있다.



그리고,회의공간인 빈청(賓廳),대청(臺廳),정청(政廳)과 어명 전달,관보 발행하는 승정원(承政院),실록을 편찬하는 춘추관(春秋館),국정 자문,간쟁하는 홍문관(弘文館),문서 제술,사초 기록하는 예문관(藝文館),어제 어필 보관,학술 연구하는 규장각(奎章閣),국왕 학습, 국사 논의 위한 경연(經筵)시행하는 경연청(經筵廳),천문(天文),측후(測候),각루(刻漏)를 맡은 관상감(觀象監) 등의 궐내각사가 있다.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門) 영추문(迎秋門) 밖에는 국정 총괄,관청 통제하고 의견 조율하는 의정부(議政府),어명에 의한 수사 및 심판, 탄핵에 대한 판결하는 의금부(義禁府),관직 및 법령 서경, 관리 탄핵,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관직 및 법령 서경, 간쟁하는 사간원(司諫院),직무 없는 당상관 우대하기 위한 중추부(中樞府),음식물 감독,왕명 전달,궐문 수직(守直),청소 등 궐내 잡무보는 내시부(內侍府),어명을 받아 장병 시찰 독려하는 체부청(體府廳),궁중 물자 공급, 연회(宴會)와 직조(織造) 관장한 내자시(內資寺)가 있다.



또,군무를 통괄하던 삼군부(三軍府),5위(五衛) 통솔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總府),도성과 외곽지역 방어하는 5군영(五軍營),왕의 계보 초상화 보관,왕과 왕비의 의복 관리한 종친부(宗親府),녹찬(錄撰)과 종실(宗室) 사무,왕실 족보 연구하는 종부시(宗簿寺),종친과 왕의 외척, 왕실 외손을 예우하는 돈녕부(敦寧府),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충훈부(忠勳府),왕이나 왕세자의 사위가 속한 의빈부(儀賓府),도교(道敎)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제사하는 소격서(昭格署)가 있다.



문관 인사,공신과 종친 관리하는 이조(吏曹)와 호구,인구 파악,통계 기록,재정 출납하는 호조(戶曹),교육,외교,문과 시행하는 예조(禮曹),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무관 인사,무과 시행하는 병조(兵曹),법령 담당,상급 재판 심리하는 형조(刑曹),모임 인허가 및 평가,물품 관리,토목 공사를 담당한 공조(工曹),서울의 수비를 담당하고 군인을 훈련 감독하는 훈련도감(訓練都監),무예 연습,병서(兵書) 강습하는 훈련원(訓練院),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등의 궐외각사가 있다.



연회공간인 경회루(慶會樓),후원 공간은 녹산(鹿山),향원정(香遠亭)과 신무문(神武門) 북편에 있는 오운각(五雲閣),옥련정(玉蓮亭),농사 기원하는 경농재(慶農齋),경농재 부속 공간 양정재(養正齋),문과 시행하는 융문당(隆文堂),융문당 부속 공간 춘안당(春安堂),무과 시행하는 융무당(隆武堂),과거 시행, 군사 훈련하는 경무대(景武臺)로 구성되어 있다.







대한 황궁 경운궁,동궐,서궐의 공간 구조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대한 황궁 경운궁(慶運宮)은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 중화전(中和殿),고종황제의 침전 함녕전(咸寧殿),고종황제 등극의례를 봉행한 태극전(太極殿),왕의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황실 도서관 중명전(重明殿),순명황후(純明皇后)의 혼전(魂殿) 의효전(懿孝殿),1900년 기공한 고종황제의 편전 겸 침전 석조전(石造殿),황실 사무, 근대적 광무개혁 추진한 궁내부(宮內府), 최고 군통수기관 원수부(元帥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덕궁(昌德宮)은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행하는 정전(正殿) 인정전(仁政殿),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선정전(宣政殿),왕의 개인 생활,침식 공간인 대전(大殿) 희정당(熙政堂),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대조전(大造殿),세자가 생활하는 동궁전(東宮殿) 중희당(重熙堂),세자 학문 강학하는 성정각(誠正閣),세자의 서재 승화루(承華樓),세자의 사무 공간 시민당(時敏堂),부속 건물 진수당(進修堂)이 있다.



내전 경훈각(景薰閣),보경당(寶慶堂),낙선재(樂善齋),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왕의 어진(御眞)봉안하는 선원전(璿源殿),선원전 재실 양지당(養志堂), 대비전(大妃殿) 만수전(萬壽殿),부속 건물 영모당(永慕堂),연회 공간 영화당(暎花棠),서재 기오헌(寄傲軒),후원은 태극정(太極亭),소요정(逍遙亭),취한정(翠寒亭),농산정(籠山亭), 취규정(聚奎亭),부용정(芙蓉亭),애련정(愛蓮亭),청심정(淸心亭),승재정(勝在亭),존덕정(尊德亭) ,관람정(觀纜亭),농수정(濃繡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창경궁(昌慶宮)은 의례 공간인 정전 명정전(明政殿),국왕 사무 공간 편전 문정전(文政殿),강학 공간 숭문당(崇文堂),중궁전 통명전(通明殿),대비전 자경전(慈慶殿),세자 강학 공간 신독재(愼獨齋),내전 환경전(歡慶殿),경춘전(景春殿),통화전(通和殿),양화당(養和堂),연희당(延禧堂),건극당(建極堂),외원(外苑) 함춘원(含春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희궁(慶熙宮)은 공식 의례와 조회(朝會)를 하는 정전(正殿) 숭정전(崇政殿),왕이 국정 사무를 보는 편전(便殿) 자정전(資政殿),왕의 개인 생활,침식하는 대전(大殿) 융복전(隆福殿),왕비가 생활하는 중궁전(中宮殿) 회상전(會祥殿),내전 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경륜재(經綸齋),위선당(爲善堂),상휘당(祥暉堂),함춘헌(含春軒),안희합(安喜閤),지효합(至孝閤), 내전 별실 덕유당(德游堂),덕유당 부속 공간 사물헌(四勿軒),내전 하례(賀禮) 공간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왕의 어진(御眞) 봉안하는 태령전(泰寧殿),왕의 신위(神位)를 모셔두는 계상당(啓祥堂),대비전(大妃殿) 장락전(長樂殿),대비전 부속 건물 봉상루(鳳翔樓),용비루(龍飛樓),대비전 별당 어조당(魚藻堂)과 동궁전 내당(內堂) 즙희당(緝熙堂),양덕당(養德堂),동궁전 부속 건물 중서헌(重書軒),동궁전 별당 경선당(慶善堂),세자 사무 공간 경현당(景賢堂),세자 서재 문헌각(文獻閣),세자 강학하는 존현각(尊賢閣),혼천의(渾天儀) 설치한 규정각(揆政閣),휴식 공간 청한정(淸閒亭),춘화정(春和亭) 등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덕수궁을 경운궁으로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라



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전 앞에 고종황제 동상을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단군(檀君)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였다.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남으로 탐라국(耽羅國: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하는 지라. 탐라에서 말갈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시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백악(白嶽 북악산)과 목멱 사이의 경운궁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 1899년 8월 17일 반포된 대한국 최초의 헌법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으며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대한국 황제의 육해군 통수권,계엄령 발포권,법률 제정·반포권,문·무관 임명권,조약 체결·선전·강화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대한국(大韓國)은 고종황제가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황제는 오전 2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경운궁 대안문부터 환구단까지 좌우로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황색 의장으로 호위하였는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고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으며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대한국을 선포한 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황제는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낮 12시에 황후를 책봉하고 2시에 황태자를 책봉하였다.



1873년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1887년 최초로 전등 점화하여 전기를 사용한 건청궁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한 고종은 대안문(大安門) 앞 환구단에서 자주 독립을 천명하고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하였으며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독도 대마도 녹둔도를 아우르는 4천리 영토를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와 애국가를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복(光復)운동을 적극 지원한 고종황제를 고액권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고 경운궁 앞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여야 하며 황토현의 기념비전 앞에 고종황제 동상을 건립하여야 한다.







민주공화제 정부를 탄생시킨 3.1 대한 광복운동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1904년 2월 대한국 영토를 군용지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고종황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22일 불법 강점한 일제는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영국과 영일동맹,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대한국 독점지배에 관한 열강의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으며 1906년 2월 한성에 설치한 통감부는 1909년 만주이권 장악을 위해 고종황제가 비준하지 않아 무효인 을사늑약에 의거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국령 간도를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총독부 독살에 의해 경운궁 함녕전에서 붕어하셨는데,2·8 대한광복선언,경운궁 대안문·고종어극40년칭경기념비전·보신각·원각사지앞 '3·1 대한광복운동',대한국 상해정부 수립의 배경이 되었고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강제로 양위당한 고종황제는 정미독립운동,대한인국민회,대한독립의군부,대한광복군정부 등 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었으며,'신한혁명단'이 고종황제를 망명시켜 광복운동을 활성화하려 하였고,고종황제는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재일 조선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선언하고 이광수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기초하였으며 백관수가 2·8 대한광복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는 3·1 대한광복운동의 도화선이 되었고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규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이 동경에 파견되어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대한 병탄이 한민족의 의사와 반하는 것이므로 대한국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한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며 한민족의 대한국 광복운동을 촉구하였다.



대한광복운동 지도자 39명은 1918년 말 길림에서 무오 대한광복선언을 통하여 대한국의 광복을 주장하였고,총독부에 의한 고종황제 붕어(崩御)로 인하여 촉발된 재일 유학생의 2·8 대한광복선언의 영향을 받은 3·1 대한광복운동은 민주공화제의 대한국 상해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제의 불법적인 대한국 병탄(倂呑)과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한민족의 광복의지를 천명하는 평화적인 대한국 광복운동이었으나 총독부는 서울,화성,천안,대구,합천,마산,익산,남원의 광복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919년 1월 21일 일제 총독부에 의한 대한국(大韓國) 고종황제의 붕어(崩御)는 2·8 대한광복선언,3·1 대한광복운동,6·10 대한광복운동,11·3 대한광복운동,대한국 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대한국 상해정부를 비롯한 대한국 광복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자주독립적인 민주공화국의 수립,대한국의 통일을 위한 한민족공동체의식으로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병탄(倂呑)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광복(光復)을 하였다.







국립박물관 문화재관리소 직급,정원 조정 직제개편을



문화재관리 기능 강화 위한 통합 문화재청 출범해야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헌법,정부조직법,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문화재관리 사무를 관장,총괄하는 문화재청은 법적,제도적 조치를 하여 한민족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민족문화유산인 문화재를 사전적,예방적으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야 하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고 있으므로 문화재청의 문화재 관리 정책 총괄,지휘 감독,법령 기획,제도 개선,교육 홍보 기능을 강화하하기 위하여 국유문화재 관리기관인 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을 직급·정원 조정하여 문화재청으로 이관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문화재관리 정책 연구,법령 기획,제도 개선,교육 홍보 및 지방자치단체,책임운영기관,발굴법인,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 지휘 감독 기능을 강화하여야 하며 매장문화재발굴조사법인,국가지정문화재수리업체,연구기관,문화기관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굴 조사,보수 복원,실측 설계,전시 기획 기능이 완벽하므로 문화부로부터 국가귀속 문화재 관리기관을 이관받고 고궁박물관(경복궁 본관/경운궁 분관),왕실문화재관리소,지방박물관,민속박물관,해양박물관,한국전통문화학교로 직제개정하여야 한다.



문화재관리 행정전문성 강화를 위한 문화재관리학 창학,공무원 특별채용 약속과 대규모 학예연구직,별정직 공무원 정원 증원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고고학,미술공예,인류민속,서지역사,전통건축,보존과학 전문인력을 수 백명 특별채용한 문화재청은 정책 연구,제도 개선,법령 기획,규칙 관리,교육 홍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문화재개론,문화재법학,문화재정책론,문화재법제론,문화재관리론,문화재활용론의 문화재관리학을 전공한 전문인력을 학예연구직,별정직,전문계약직 공무원으로 특별채용하여야 한다.



문화재 관리체계를 전문화,특성화하고 왕실문화재,지역 연고,국가 귀속 문화재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고궁박물관은 경운궁 분관을 신설하고 민속박물관은 이전하여야 하며 문화재는 조직,인력에 의한 사전적 예방적 관리가 중요하므로 고궁,민속,해양,서울,경주,대구,김해,진주,전주,광주,공주,부여,청주,제주,춘천박물관의 직급,정원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특성과 지역 연고에 따라 문화재를 이관하여야 하며 궁관리소,왕릉관리소를 통폐합하여 경운궁에 왕실문화재관리소를 신설하여야 한다.



문화재는 보존공물로서 사람처럼 멸실,훼손되면 재생이 불가능하므로 소유,지정과 관계없이 공용제한을 받아야 하며 문화재청이 국보급 문화재의 관리를 지자체,법인,대학,단체에 위임,위탁하거나 개인이 소장하는 것은 적법,타당하지 않으므로 문화재청은 국보급 문화재를 소속기관으로 이관,귀속하여 중점 보호하여야 하며 무자격 수리,무허가 반출,도굴,손상,절취,은닉,방화,위조,파괴,일수 등 문화재사범의 죄형을 세분화하고 형사처벌,행정처분을 강화하여 사전적,예방적,적극적,능동적으로 관리하여야 한다.







경운궁 태극전 개칭하고 환구단 원형 복원하라



고궁박물관은 대한국 영광의 역사를 전시하라





김민수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을사늑약,경술늑약에 의해 설치된 통감부,총독부,경성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원묘,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 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교육기관,기록기관과 일본,프랑스,북한이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순종황제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설립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 후 총독부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국외로 불법 반출 후 환수,교육기관·문화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고문서·고지도·사진 등 황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고 통치체제(도성·궁궐 지도,사진),대외관계(태극기,KOREA,독도·간도 지도),왕실의례(환구제,사직제,문묘제)를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전문가,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일제 총독부는 백악산 경복궁 북원에 총독관저를,신무문 앞 건청궁에 총독부박물관을,흥례문에 총독부를,환구단에 철도호텔을,목멱산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이전하고 통감부 일본신사를,경희궁에 일본인학교를,창경궁에 동물원을,경운궁 궁내부 대안문을 철거 이전하고 경성부를 악의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문화재청은 경운궁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청사,서양미술관을 철거하고,고종황제 편전 석조 전각에 고궁박물관 경운궁 분관을 개관하여야 하고 황궁우 석고단과 경운궁 대안문 사이에 환구단을 복원하여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일반에 공개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한 황실 궁내부,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황실사무청,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관리국을 계승한 문화재청은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중점보호하고 경운궁 궁내부 원수부 선원전 흥복전 흥덕전 의효전 경복궁 융문당 융무당 경농재 대유헌 벽화실 지선실 의정부 한성부 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기로소 6조 인경궁 사직서 내시부 체부청 종친부 장생전 종부시 사간원 규장각 소격서 승정원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상의원 5위도총부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별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장충단 보신각 기념비전 돈의문 숭례문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 철거하고 원형 복원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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