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0년전 양평에 마한연맹 일화국(日華國)이 존재했다
2100년전 양평에 마한연맹 일화국(日華國)이 존재했다
  • 양평백운신문편집국
  • 승인 2008.12.1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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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연맹체ㆍ삼국시대등 사라진 상고 역사 복원 시급

현재 양평지역의 역사를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고려사(권 56. 지 10. 지리 1)부터 시작된다.


고려사에는 “양근현은 본래 고구려의 ‘양근군’이었으며 ‘항양’이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삼국통일후 757(경덕왕 16)]때 ‘빈양현’으로 고쳐 소천군의 관할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초에 옛 명칭(양근)으로 고쳤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권 37. 지 6. 지리 4. 고구려편)에는 “양근현은 일명 거사참이라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삼국사기(권 35. 지 4. 지리 2 신라편)에는 “지평현은 본래 고구려 ‘지현현’인데 경덕왕이(삭주의 관할현) 고쳐서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때 「양근ㆍ함양ㆍ거사참과 지현」으로 불리웠고 신라때 「빈양, 지평」으로 불리우던 양근ㆍ지평의 그 이전의 역사는 과연 뭐였을까?


양평지역은 고구려ㆍ신라ㆍ백제 3국이 한강유역을 확보키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인 곳이다.


한강유역이 인적ㆍ물적 자원지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지정학적 중국과 통교하는 해상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항양ㆍ양근군 이전에는 양근은 백제 땅이었다. 백제 근초고왕은 26년(371년)에 3만명을 거느리고 북진 평양성을 공격, 고구려 고국원왕을 죽이고 옛 대방군의 땅을 빼앗고 국경을 예성강까지 확대한 후 철군하였다.


적어도 양평이 4세기 말까지는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3)때에 다시 고구려로 복속되었음이 분명하다.


광개토대왕은 즉위초 392년 7월 백제를 공격해 10성을 빼앗고, 같은해 10월 관미성을 공격, 20일만에 함락시켰다. 393년 왕이 직접수군을 이끌고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모수ㆍ관미ㆍ아단ㆍ미추성 등 58개성과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서까지 육박하자 백제의 아신왕은 항복했다.


백제에 대한 공격은 그의 아들 장수왕(475년)때까지 이어졌다.


결국 백제는 500년 동안 지켜오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후 백제 성왕 29년(551) 신라 진흥왕과 공동작전을 펴 한강유역을 회복했으나 나제 동맹 2년후인 성왕31년(553)에 동맹이 깨지면서 신라는 양평을 포함해 한강 하류지역까지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렇다면 양평의 최초 기록은 언제쯤이었을까?


BC 2세기 말에서 1세기 초(서기전 100년 전후)에 양평에는 마한연맹체 소국「일화국(日華國)」이 있었다. 이때 서울 풍납토성 일원에 형성됐던 소국, 백제(百濟 또는 十濟)가 인근에 지배영역을 확대하면서 그 중심지를 하남위례성으로 옮기고 온조가 등장하면서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치고 양평의 일화국을 비롯 상외국(화성), 우휴모탁국(부천), 신분활국(양성), 모수국(수원), 속로불사국(통진), 자리모로국(이천) 등 10여개국을 병합했다.


이것이 바로 백제의 기원이다.


실제 비류와 BC 9년에 남하한 온조는 서기 5년에 풍납토성 일원에 나라를 세우고 서기 20년 온조왕은 동쪽으로 여주ㆍ양평ㆍ춘천가지 영토을 넓히자 서기 22년 가을과 겨울 말갈족이 술천성과 부현성을 쳐들어와 100여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온조는 백제 기병 200명을 보내 이를 물리쳤다.


술천성은 고구려때 술천군, 신라 경덕왕때 소천군ㆍ기천군, 고려때 천령군으로 이포 인근을 말한다.


여주는 고구려때 골내근현, 경덕왕때 황효현, 고려때 황려현, 조선태종대 여흥부로 승격되었으며 세종대왕때 영릉을 옮기면서 여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문에 인근 천녕군은 현으로 격하되었다. 여주ㆍ양근을 관할하던 천녕군 옛 관아터는 지금의 이포 서쪽 ‘금사면 궁리’쯤으로 유추되고 있다. ‘궁’자 지명으로 보아 일화소국의 궁성이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천녕(술천)의 옛이름은 술모로ㆍ솔모루(술천성의 ‘술’자에 배어있다) 지금도 이포에서 천서리로 가는 지명이 배나루, 배개나루, 천양나루인데, 천양은천녕이 바뀐 말인듯 하다.


AD 1~36년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경질타날문토기가 백제 초기 유적은 양평 대심리 철기 유적과 가평 마장리 철기유적(서기 200년)에서도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부여의 영향을 받은 돌무덤식 백제 초기 무기단 적석묘가 양평 문호리, 양수리, 석장리 등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고구려식 피라미드형 기단식지석묘보다 훨씬 앞선 부여 위족 계통의 묘 형식이다.


특히 양서면 신원리 부용산(해발 365.9m)의 정상을 둘러싸고 있는 543.7m의 신원리성(긴 축 200m, 짧은 축 50m)은 백제초기 연질토기인 회색 연질토기, 고배 및 회색청토기가 채집되어 양수리 용진(두물머리)을 지키는 백제초기 중요한 성으로 판명되었으며, 최근 여주군에서 파사산성을 조사한 결과 백제초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 일화국(日華國) - 중국《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한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새로운 종족이 이주하여 성립하였다고도 하고 본래의 토착민 세력이 점차 발전하여 이룩한 정치집단이라고도 한다. 여러 개의 읍락으로 이루어졌으며 읍락 간에는 물자를 주고받는 교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적 위치는 지금의  경기도 양평 부근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이들은 마한연맹체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굳건히 동맹을 맺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하였다. AD 3세기 후반까지 성장하다가 백제에 통합되었다.

                      박현일기자 hi53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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