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억하며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억하며
  • 백운신문편집부
  • 승인 2007.07.16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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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체결에 따라 대한제국은 외교권 박탈과 국권 상실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열강에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고자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고종황제의 신임장과 밀서를 지니고 두 달여에 걸친 여정 끝에 러시아를 거쳐 이 세 사람은 어렵게 헤이그에 도착했지만. 이미 세계의 열강들은 서로의 식민지 점령을 인정해주고 있었고 일제가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 역시 강대국 정부들이 승인한 뒤였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자주적인 외교권도 인정받을 수 없었고 회의 참석, 발언권도 얻을 수 없었다. 미국, 프랑스, 중국, 독일의 대표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그때 특사들의 심정은, 길거리에서 다쳐서 쓰러져 있어도 그 누구도 도와주기는 커녕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조차 듣지 않으려고 거리 밖으로 밀어내는 심정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황제의 미약한 희망이 담긴 명령을 받고, 조국의 외침이라는 무겁고 무거운 사명을 어깨에 짊어졌던 특사들로서는 포기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주장을 담은 공고사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신문기자단의 국제회의에 참석해서 발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외국어에 능통했던 이위종이 한국의 비참한 처지를 알리는 '한국의 호소'라는 절규를 통해 동감을 이끌어내고 즉석에서 한국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울분 끝에 이준은 현지에서 순국했고, 회의가 종료된 후에도 나머지 특사는 유럽을 돌며 외교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이 사건에 크게 분노한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키는 한편 한국 침략의 속도를 높였다고 한다.


 누구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멀고 먼 이국땅에서 특사들의 심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해야 하는 그 이야기가 조국을 위해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지만 조국을 위해서이기 때문에 아무리 문전박대를 받아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 어려운 상황에서 강대국들을 찾아다니며 회의참가를 위해 도와줄 것을 절실히 호소하고, 그 호소가 거절당할 때마다 약소국의 서러움과 희망이 하나씩 꺾이는 고통으로 괴로워했을 3명의 특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공고문을 발표하고,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기자단회의에서 열정적으로, 그러나 절실하게 한국인의 호소를 전달했던 특사들의 모습, 절망적인 열정을 상상해본다.


지금 어느 외교관이 이 정도의 역할을 했다면 정말 최고의 톱뉴스일 텐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나라가 있다는 것에 고마움은 커녕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을 부끄럽게까지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2007년 6월 27일 우체국에서 헤이크 특사 100주년을 맞이하여 '헤이그 특사와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담은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100년 전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싸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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